WHO “유전자 편집은 인류의 건강 증진에 도움”
윤리 논쟁 불렀던 유전자 편집에 대해 첫 긍정 입장
”전세계가 공유할 DB구축하고 내부고발 시스템도 갖춰야”
특정 DNA를 자르거나 교정하는 기술인 유전자 편집(genome editing)은 난치병 등을 치료할 수 있는 첨단 의료 기법으로 주목받았지만 사람이 인위적으로 유전자에 손을 댄다는 점 때문에 거센 윤리적 논쟁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가 12일(현지 시각) “유전자 편집은 인류의 건강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쓸 수 있다”고 밝히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안전·효율성·윤리적 측면을 강력히 고려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WHO가 유전자 편집에 대해 인류에 도움이 되는 의료 기술로 긍정적 판단을 내린 것은 처음이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이날 ‘공중보건의 발전을 위한 인간 유전자 편집에 대한 새로운 권고’를 발표하며 “인간 유전자 편집은 질병을 치료하는 우리의 능력을 발전시켜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국가 간 보건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고 모든 인류의 건강 증진을 위해 사용될 때 효용이 완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게놈을 형상화한 그림.
지난 2018년 중국 선전 남강과기대의 허젠쿠이 박사는 “배아 단계에서 유전자 가위(세포에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는 효소)를 이용해 유전자를 교정한 결과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대해 면역력을 갖게 된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발표했다.
이는 곧 유전자 편집 기술 전반에 대한 윤리성 논쟁으로 이어졌다. WHO는 유전자 편집을 의술에 활용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한창 불붙던 2019년 전 세계의 과학자와 의료진, 환자, 종교 지도자 등 수백 명으로 패널을 꾸려 논의에 착수했고 2년여 작업을 거친 결과물로 이번 보고서를 냈다.
WHO는 이번 보고서에서 “인간 유전자 편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익으로는 신속하고 정확한 진단, 좀 더 정확한 맞춤형 치료와 유전병의 예방 등이 있다”고 했다. 또 유전자 편집 기술은 다양한 암 치료 방법의 개선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WHO는 그러면서도 유전자 편집 과정에서 인간 배아의 게놈이 변형돼 자손 세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등의 부작용의 위험성과 해서는 안 되는 연구와 실험의 유형들도 상세하게 제시했으며, 세계 공통 윤리 기준의 제정 필요성도 언급했다.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들은 이번 WHO 보고서가 각종 유전자 관련 인체 실험이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것을 제어하는 성격도 있다고 분석했다. 앞서 지난해 노벨화학상 수상자에 유전자 편집을 개발한 여성 과학자 두 명이 선정되면서 유전자 편집이 의술을 넘어 일상 곳곳에서 널리 활용될 것이라는 전망도 잇따른다.
중국 남방과기대의 허젠쿠이 교수가 2018년 11월 25일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유전자를 편집한 아기 출산에 성공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DB
WHO 보고서는 또 유전자 편집의 실제 활용 상황에서 적절성 여부 등을 판단해야 하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한 구체적인 시나리오들도 제시했다. ‘아프리카 서사하라에서 창궐한 적혈구이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가상의 유전자 편집 임상 실험’ ‘육상 선수의 성적을 강화하기 위한 유전자 편집 제안’ 등이다.
WHO는 보고서에서 각국에서 진행 중인 유전자 편집 연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글로벌 차원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또 비윤리적인 행위를 적발할 수 있는 내부 고발 체계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정지섭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