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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를 위한 작은 공장 ‘팹랩’ 아세요? - “월 5만원 회비로 누구나 공장 소유”

해암도 2013. 3. 19. 05:51

머릿속 아이디어 이곳에 오면 시제품으로 짠…

 
서울 세운상가에 둥지 튼… 모든 이를 위한 작은 공장 ‘팹랩’ 아세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작은 공장이 제조업 트렌드를 바꾸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팹랩 서울에서 박현우(왼쪽) 고훈민 씨가 3차원(3D) 프린터를 이용해 곰 모양 인형을 입체 인쇄하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5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낡은 엘리베이터는 끊임없이 삐걱거렸다. 한때 “한 바퀴만 돌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던 ‘전자제품의 메카’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는 지방선거 때마다 철거하느니 유지하느니 격론이 벌어지는 대상이 됐다. 이 쇠락한 상가 5층 구석에 작은 사무실이 들어섰다. ‘팹랩 서울’이다. 》
이곳은 말 그대로 ‘제조 연구소’(Fabrication+Laboratory)다. 일반인을 위해 레이저 커터, 3차원(3D) 프린터, 조립식 회로기판까지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공구를 갖춰 놓았다. 월 5만 원의 회비로 누구나 이런 공구 사용법을 배우고 자신에게 필요한 공산품을 만들 수 있다.

팹랩 서울은 모든 이를 위한 작은 공장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완구점에서는 팔지 않는 독특한 장난감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가구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창업을 꿈꾼다. 컴퓨터 한 대로 시작해 세계적인 회사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 벤처기업이 늘어나고 있지만 팹랩 서울을 찾는 사람들은 “제조업 벤처도 소프트웨어 벤처처럼 쉽게 만들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띈 것은 미국 자연사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육식공룡 티라노사우루스의 골격 모형이었다. 나무 합판을 잘라낸 뒤 끼워 맞춰 만든 제품이다. 왼쪽 책상 위에는 레이저 커터를 이용해 만든 감사패와 선반 등이 있었고, 오른쪽 책상에는 3D 프린터로 ‘입체 인쇄’한 휴대전화 케이스와 모형 로봇이 놓여 있었다. 3D 프린터는 종이에 잉크를 인쇄하는 대신 허공에 합성수지를 인쇄하듯 층층이 쌓아올려 모형을 만들어내는 기계다.

팹랩 서울을 세운 창업지원재단 타이드인스티튜트의 고산 대표는 “여기서는 잠수함은 못 만들어도 레이저 커터보다 작은 부품을 사용하는 것은 뭐든 만들 수 있다”며 사무실 벽에 놓인 전기부품 선반에서 프로펠러가 4개 달린 헬리콥터를 꺼내들었다.

그는 “이것은 아두이노라는 회로기판을 이용해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는 것처럼 재료를 조립해 만든 촬영용 헬리콥터”라고 설명했다. 아두이노는 마치 완구 라디오를 만들 듯 대량생산한 회로기판이다. 이를 PC와 연결하면 컴퓨터로 작성한 프로그램을 저장해 산업용 반도체 장비 없이도 기계를 제어할 수 있다.

이런 설비를 조합하면 실제로 어지간한 기계는 다 만들 수 있다. 레이저 커터와 밀링머신으로 나무나 금속판을 잘라 외관을 만들고, 각종 부품은 3D 프린터로 찍어내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기계를 작동시키는 두뇌 역할은 아두이노 회로가 맡는다.

팹랩 한 곳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임차료를 제외하고 설비 가격만 약 5000만 원 수준이다. 개인이 이런 장비를 갖추는 건 힘들지만 공공 목적으로 설치하기엔 크게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다. 게다가 이런 장비는 모두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기술로 작동한다. 숙련공의 노하우 없이도 컴퓨터를 잘 다룬다면 누구나 비슷한 품질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게 특징이다.

 

▼ “월 5만원 회비로 누구나 공장 소유” ▼


팹랩은 1998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한 강의에서 시작됐다. 컴퓨터로 설계한 각종 아이디어 제품 가운데 기발하고 쓸모는 있지만 용도가 특수해 사용자가 제한적인 제품이라 대량 생산이 어려운 것들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MIT는 학생들을 상대로 강좌를 운영하다 2005년 일반인까지로 대상을 확대한 첫 팹랩을 보스턴에서 열었다. 이후 팹랩의 설립 취지에 동의한 세계 각국의 교육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등이 이런 소규모 ‘제조업 허브(hub)’를 만들기 시작했다. 18일 기준으로 팹랩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51개국에서 241개가 운영되고 있다.

팹랩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자격은 없다. MIT는 “시설을 안전하게 사용하고, 아껴서 관리하며, 팹랩 활동을 통해 쌓은 지식을 공유하자”는 원칙을 세운 뒤 이를 지킨다면 세계 어디서 누구든 팹랩을 만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런 형태의 소규모 제작소들이 늘어나면서 최근 제조업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3D 프린터는 제품을 물리적으로 운송하지 않고도 설계도만 멀리 떨어진 곳에 인터넷으로 전송하면 똑같은 제품을 재현하도록 도와준다. 멋진 디자인의 컵을 사는 대신 컵의 설계도를 e메일로 받아서 집에서 직접 찍어내는 식이다. 초기의 3D 프린터는 플라스틱 제품만 찍어냈지만 최근에는 금속 소재를 쓰는 제품도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런 흐름을 읽고 2월 국정연설에서 “3D 프린터는 우리가 제품을 만드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꿀 잠재력을 갖췄다”며 “이런 하이테크 생산방식이 늘어난다면 다음의 제조업 혁명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가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로 떠났던 미국의 제조업이 기술 발전에 힘입어 미국으로 돌아오리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팹랩 같은 장소를 통해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예비 사업가도 늘고 있다. 시제품 제작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도도케이스라는 회사는 태블릿PC용 케이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교한 시제품을 팹랩과 유사한 테크숍이라는 공동 제작소에서 만들었다. 그러고는 이 시제품을 투자자들에게 보여 자금을 유치하고 대량생산을 시작해 기업을 세웠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경기지방중소기업청이 타이드인스티튜트와 함께 진행했던 팹랩 형태의 ‘셀프제작소’ 과정에서 캡슐커피 거치대를 만든 뒤 상품화에 성공하기도 했다.

고 대표는 “팹랩 같은 시설은 제조업 창업의 징검다리 역할은 물론 사회문제 해결이나 예술 활동에도 쓰인다”며 “전쟁으로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팹랩이 생필품을 만들었고, 세운상가 팹랩에도 아이디어를 공예품으로 완성시키려는 조각가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2013-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