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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대신 풀만 먹고 자란 韓 전통 ‘호랑이 무늬 소’

해암도 2024. 1. 8. 06:51

[미래 농업을 여는 사람들]② 

김영길·김성기 아침목장 대표

 

소는 본래 풀을 먹는 동물이다. 목가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그 배경에 으레 풀을 뜯는 소가 자리한다.

 

1970년대 이전까지 농가에서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여물을 쑤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여물은 소가 먹는 죽 ‘쇠죽’이다. 길고 뻣뻣한 풀을 소가 잘 소화할 수 있도록 돕고 영양가를 높이기 위해 한 번 끓여 죽처럼 만든다.

 

그러나 이후 산업화로 농기계가 보급되면서 소는 더 이상 풀을 먹을 필요가 없어졌다. 외국에서 곡물과 배합사료를 수입해 먹이기 시작했다. 풀 대신 사람이 먹는 곡식, 체격을 불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배합사료를 먹자 소는 더 빨리 자랐다. 근육 사이에 지방층(마블링)도 도톰하게 생겼다.

 

시중에서 파는 쇠고기 가운데 99%는 배합사료로 키운 한우다. 풀 먹인 한우, 그 고유한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소에게 여물을 먹였다.
소는 여물만 먹어도 논밭을 갈아 엎을 수 있는 힘을 낸다.
 
일한 소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다시 퇴비로 썼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니 땅도 건강하고 좋은 농산물이 나왔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

김영길 아침목장 대표

그래픽=손민균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면에 자리잡은 아침목장은 여물을 먹이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농장이다. 김영길 대표와 그 아들 김성기 대표는 2015년 이후 9년째 목장을 경영하고 있다.

 

아버지 김영길 대표는 팜스토리한냉에서 축산유통 실무자, 도축장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소세지를 만들면서 소화기관이 온통 지방으로 뒤덮여 있고, 일부는 녹아 내린 소들을 봤다. 사람으로 치면 심각한 성인병에 걸린 소들이었다.

 

김 대표는 “살아있을 때 만이라도 원래 먹던 건강하고 편안하게 자란 소가 맛도 좋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는 축산식품생물공학과를 나온 아들 김성기 대표와 여물 만드는 방식을 연구했다. 매일 새벽 농장에 나와 전통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재료 배합과 공정을 다시 맞췄다.

 

적당한 스팀을 사용해 재료를 연하게 하고, 미생물을 첨가해 발효를 통한 영양 성분도 새로 더했다. 김 대표는 이를 ‘열기로 익혔다’ 해서 화식(火食)이라 불렀다.

 

“꼭 이런 방식이 전통적이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좋은 사료를 먹일 방법을 찾다보니 발효한 화식이라는 방법을 찾아낸 편에 가깝습니다.”

 

화식은 단순히 소고기를 건강하게 바꾸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농업에도 상당한 도움을 준다. 깻묵이나 대두박, 빵박 같은 식품 부산물을 이용해 화식 사료를 만들어 먹이면 곡물 이용량을 높일 수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김성기 대표는 아버지가 키운 소를 맛볼 수 있는 정육식당을 아산 시내에서 직접 운영한다. 그는 “화식을 먹여 키운 소고기에서는 구수한 맛이 난다”며 “인공사료를 먹여서 키운 요즘은 맛보기 힘든 감칠 맛이 많이 나 일정하게 찾는 단골 층이 두텁다”고 말했다.

그래픽=정서희
 

아침목장은 동시에 국내에서 명맥이 끊겨가는 재래소 품종을 살리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현재 키우는 300두 가운데 80두 정도는 ‘호랑이 소’라 불리는 칡소다. 칡소라는 품종은 화식이라는 단어만큼 생소하다.

 

칡소는 우리 역사와 함께한 토종 한우다. 한우라고 하면 누런색 또는 적갈색을 띠는 한우, 즉 황우만 생각한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황우를 비롯해 검은색 흑우, 흰색 백우(白牛) 등 다양한 소가 2000년 이상 살아왔다. 이 중 하나가 칡소다.

 

농촌진흥청은 이 시에 나오는 얼룩백이 황소가 칡소라고 평가한다. 칡소는 겉보기에 검은 줄무늬가 멋스러운 우리나라 전통소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점차 자취를 감춰 현재는 전국에 2300여마리만 남아있다. 아침목장에서는 이 가운데 3.5%에 해당하는 80여마리를 키우고 있다.

 

축산과학원이 칡소 고기 맛 특성을 조사한 결과, 유리아미노산 함량 분석에서 단맛과 관련된 알라닌, 프롤린, 트레오닌이 많은 편으로 나타났다.

 

향기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서는 구운 고기향을 내는 피라진류 함량이 높았다. 한우와 차별화한 특유의 육향(肉香)과 남다른 식감을 지녀 별미로 적합하다는 의미다.

 

김성기 대표는 “화식을 한 칡소는 특히 국으로 우려냈을 경우 다른 소와 풍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다만 칡소는 꾸준히 계량을 거듭한 일반 한우에 비해 몸집이 작고 더디게 자란다. 근내 지방도(마블링)과 육색(肉色)을 기준으로 등급을 판정하는 현행 한우 등급 체계에서 높은 등급을 받으려면 한우보다 더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출근해 업무 일지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다”며 “이제서야 칡소를 개량하는 연륜이 쌓이면서 좋은 종자 네 마리를 확보할 만큼 화식 칡소 키우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아산=유진우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