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남집, 커봐야 몇평이냐” 50년 침묵하던 성파스님의 한마디

해암도 2021. 12. 17. 06:01

백성호의 현문우답

 

14일 경남 양산의 통도사 서운암으로 갔다. 하루 전날 대한불교 조계종 제15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된 성파(性坡) 스님을 만났다. 통도사 방장인 성파 스님은 “뭐하러 올라카노. 그냥 담에 보자 마”라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내년 3월에 취임하는 데다, 현 종정인 진제 스님이 계시니 예(禮)가 아니라고 했다.

삼고초려 끝에 성파 스님과 마주했다. 종정은 조계종의 정신적 지도자다. 차기 종정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에서 해방되던 이듬해 성파 스님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5년 후에는 한국전쟁이 터졌다. 결국 성파 스님은 서당으로 가서 한학을 공부했다. 송봉근 기자

성파 스님은 “고향은 경남 합천이다”고 했다. 3남 1녀 중 차남이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동네에서는 별나다는 소리도 들었다. 화를 한 번 내면 불같이 낸다고 해서 동네에서 어릴 적 별명이 ‘불 칼’이었다. 한 가닥 하는 성품이었다.

1939년생인 성파 스님은 해방되던 이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왜놈 순사가 말 타고 칼 차고 다니던 것도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6ㆍ25 전쟁이 터졌다. 낙동강 지역까지 인민군에 점령됐다. 내가 살던 합천과 이웃 고령도 인민군에 점령됐다. 밤이면 ‘피융 피융’하며 총알이 날아다녔다. 전쟁터에서 사람 죽는 것도 보고 그랬다. 그러니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기가 힘들었다.”

 

이웃 마을 학교는 불에 타버렸고, 성파 스님이 다니던 학교는 방위군들이 와서 주둔했다. 그나마 수업이 있을 때는 천막도 없이 들판에서 했다.

 

인민군이 후퇴하며 북으로 올라가자 성파 스님은 서당으로 갔다. 거기서 정규 교육 대신 한학을 배웠다. “명심보감부터 사서삼경을 다 배웠다. 옛날로 치면 과거를 보러 갈 수 있을 정도로 한학을 익혔다.”

 

성파 스님의 선근(禪根)은 남달랐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처음 접할 때부터 각별했다. “서당에서 처음에 『명심보감』을 배웠다. 제목 그대로 ‘마음을 밝히는 보배 거울’이란 뜻이다. 나는 훈장님에게도 물었고, 주위 선배들에게도 물었다. ‘마음이 뭔데 밝혀야 하나. 그럼 마음이 어둡기도 하나. 어떨 때는 어둡고, 어떨 때는 밝나. 그럼 도대체 마음이 뭔가. 그게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아무도 답이 없더라.”

성파 스님은 "새가 숲속에 있을 때는 거기가 불국토인 줄 모른다. 새장에 갇히면 비로소 알게 된다. 숲에 살 때가 불국토라는 걸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똑같다. 사람들임 모를 뿐이다. 여기가 불국토임을 말이다"라고 말했다. 송봉근 기자

 
그래서 어떻게 했나.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니 나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하늘이란 것은 소리가 없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멀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푸르기만 푸른데 어느 곳에서 찾을꼬?’ 그에 대한 답이 ‘도지재인심(都只在人心)’이라. 다만 사람 마음에 있다고 했다.”

당시 성파 스님은 열댓 살이었다. 한자도 잘 몰라 옥편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만 뜻에 대한 궁금증은 무척 강렬했다. “골똘히 생각했다.  깊게 생각했다.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물음은 좀체 잠들지 않았다. 급기야 20대 초반에 성파 스님은 머리를 깎고 통도사로 출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향이 합천이다. 해인사가 가깝다. 왜 통도사로 출가했나.
“해인사는 집하고 너무 가까우니까. 아는 사람도 많고. 친구도 찾아올 수 있지 않나. 그래서 더 먼 곳으로 갔다. 통도사는 불지종가(佛之宗家)이고, 큰스님들도 많이 계시고, 대중 스님도 많이 계시지 않나. 산을 찾아도 큰 산을 찾아야 하니 통도사로 왔다.”  

성파 스님은 숨 쉬는 장독 5000개를 수집해 우리 고유의 장류인 된장과 고추장, 간장 등을 전통 제조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송봉근 기자

 

성파 스님은 출가 후 줄곧 통도사에서 살았다. 강원(講院, 승가의 대학)을 졸업한 후 선방을 다니며 36안거를 했다. 동안거와 하안거를 빠짐없이 채워도 꼬박 18년 세월이다. 성파 스님은 “선방의 안거는 나한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즐거운 생활이었다”고 말했다.

성파 스님이 30대 초반 때였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는 ‘당대의 선지식’으로 불리던 80대의 경봉 스님(1892~1982)이 주석하고 있었다. 극락암 선방인 호국선원에서 참선하던 성파 스님은 문득 평생 품었던 물음을 풀었다.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답이었다.  “그때 게송이 딱 나오더라.”

 

어떤 게송인가.
“‘아심여명경 조진불염진(我心如明鏡 照塵不染塵)’. 내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아서, 티끌이 비치긴 비치되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왜 마음이 맑은 거울인가.
“내 마음이 거울과 같더라. 뭐든지 다 비친다. 배가 있으면 배가 비치고, 사과가 있으면 사과가 비친다. 그런데 비칠 뿐이지, 나는 물들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고 긁히지도 않더라. 다만 비칠 뿐이다.”

인터뷰를 하던 성파 스님은 작은 종이에 게송을 적었다. 30대 초반에 경봉 스님에게 내놓았던 바로 그 게송이었다. 송봉근 기자

성파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에서 참선을 하다가 "마음이 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문득 얻었다. 송봉근 기자

 

그건 마음의 바탕을 깨치는 소리였다. 자신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올라온 물음을 화두 삼아 스스로 본성을 뚫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 ‘성파의 오도송(悟道頌ㆍ깨달음의 노래)’이었다.

성파 스님은 경봉 스님을 찾아갔다. “극락암에서 마주 앉은 경봉 스님에게 게송을 적어서 내밀었다.” 고개를 넘어간 사람은 고개를 넘어온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는 법이다. 그걸 본 경봉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파의 견처(見處)를 인가(印可,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확인하여 증명함)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러주었다. “입을 닫고 가만히 있어라.”

 

경봉 스님은 왜 “입을 닫고 가만히 있어라”라고 했나.
“그게 또 법문이다. 맹금(猛禽ㆍ사나운 새)은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나도 지금까지 그걸 덮어놓고 생활했다. 입을 다물고 살았다. 주위 스님들에게도 일체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난생처음으로 내놓는 거다. 이제는 해도 되리라 본다.”

당시 경봉 스님은 성파 스님에게 “능문능시(能文能詩)”라고 했다. ‘능히 글을 짓고 능히 시를 쓴다’는 뜻이다. 선가의 어법으로 풀면 “마음자리를 알고, 그걸 자유자재로 풀어낸다”는 의미다.

또 경봉 스님은 “속불혜명(續佛慧命)을 희옹희옹(希顒希顒)하노라”라고 했다. “부처의 법을 잇기를 바라고 또 바라노라”는 의미다. 통도사 조실이던 경봉 스님은 30대 초반의 수좌 성파 스님의 견처를 그렇게 인가했다.

경봉 스님에게서 견처에 대한 인가를 받고서도 성파 스님은 50년 가까이 주위에 굳이 알리지 않았다. 따로 알릴 이유가 없었다는 게 성파 스님의 대답이었다. 송봉근 기자

50년째 숨기고 있던 맹금의 발톱을 성파 스님은 이날 처음으로 내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던 성파 스님은 “나는 무진(無盡) 보배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그건 어떤 삶인가.
“강남 아파트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몇 평이나 되나. 많은 사람에게 그런 건 ‘그림의 떡’이다. 대신 이 자연을 봐라. 자연은 임자가 없다. 달이 임자가 있나? 없다. 그러니 내 달이라고 하면 내 달이다. 강 위에 부는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내가 아무리 취해도 금할 사람이 없다. 아무리 써도 바닥날 일도 없다. 나는 그걸 즐긴다. 그렇게 무진 보배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그런 삶의 선택권이 있다.”

성파 스님은 “한국 불교에 대해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말했다. “중국 부처와 한국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부처는 똑같은 부처다. 우리나라에도 대단한 선사들이 무수히 많다. 자장 스님이나 원효 스님은 대단하셨고, 고려 16국사와 고려말 나옹 선사도 굉장한 분이셨다. 무학 대사와 서산 대사, 사명 대사와 경허 선사도 놀라운 분들이셨다.”

이말 끝에 성파 스님은 “이건 한국 불교의 큰 보배이자 자산이다. 오히려 우리가 한국 불교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성파 스님은 82세의 나이에도 정정하다. 건강 비결은 따로 없다고 했다. 그저 즐겁고 보람차게 열심히 일을 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건강 비결로 들렸다. 송봉근 기자

성파 스님은 올해 82세다. 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올 때면 서울역에 있는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오른다. 그만큼 정정하다. “나는 건강하고 싸움을 안 한다. 실랑이를 안 한다. 관심을 안 둔다 이말이다. 그냥 항상 움직일 따름이다. 무언가를 창조하고 생산하는 자체가 즐겁다. 사람이 살다가 지나간 걸 발자취라고 하지 않나. 나는 발자취 남기려고 걷는 게 아니다. 그냥 걷는다. 걷는 것 자체가, 일하는 것 자체가 보람차고 즐겁다. 그래서 그냥 걸어간다.”

성파 스님은

성파 스님은 1939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통도사에서 출가했다. 강원을 졸업한 뒤 선원에서 수행했다. 통도사 주지를 지냈고, 총림의 이인자인 수좌도 역임했다.


 성파 스님은 10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옻칠을 개발해 한국의 전통 민화를 되살렸다. 고려와 조선의 모든 불화를 옻칠로 제작했다. 장장 10년에 걸쳐 650t에 달하는 도자기를 구워서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다. 현재 통도사 서운암 장경각에 모셔놓았다.

 이뿐만 아니다. 5000개에 달하는 숨 쉬는 전통 장독을 수집해 한국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고 있다. 고추장과 된장, 간장을 만들어 사찰의 자립경제를 위해서도 애를 쓴다. "머지 않은 미래에는 사찰이 자신의 힘으로 경제를 꾸려야 할 것"이라는 게 성파 스님의 평소 소신이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1.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