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진중권 "피터팬 돼 후크 선장 물리치니, 웬디는 사모펀드 했더라"

해암도 2021. 10. 11. 17:09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권혁재 기자

 

 

"2016년, 팔로워 86만의 트위터 계정을 폭파하고 조용히 지내다 조국 사태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은퇴 3년 만에 다시 불려 나왔다. '진보'의 위선을 드러낸 조국 사태는 내 영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의로운 친구와 동지로만 알았던 이들의 추악한 민낯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내게는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최근 낸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 당시 비판의 선봉에 섰던 진 전 교수는 현재 문재인 정부의 가장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꼽힌다. 2019년 조국 사태를 계기로 칼끝의 방향을 거꾸로 잡게 됐다. 일각의 '모두까기'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같은 편'이라도 언제든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사회에 미친 여파가 컸다. 진 전 교수 자신도 "패닉 상태까지 갔다"고 말할 정도로 그간 함께 걸어온 동료나 지지층과 결별도 쉽지만은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는 그동안 언론에 기고했던 칼럼 등을 다시 묶은 책이다. 윤석열 현상부터 검찰개혁, 문재인 정부의 실정, 세대 문제 등을 7개의 챕터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상당수의 내용이 문재인 정부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로 채워져 있다. '의로운 친구와 동지'를 비판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3일 진 전 교수를 만나 들어봤다.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나라인가

 

 

동지들의 추악한 민낯을 보는 것이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이라고 표현했다.조국 사태 전까지만 해도 현재 더불어민주당 세력이 상대적으로 진보이고, 사회적 약자 편에 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을 거치며 586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면서 과거에 비판했던 대상과 똑같은 권력자가 되어 있더라.

 

비유하자면 나는 피터팬이 되어서 네버랜드를 구하기 위해 후크선장을 물리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후크 선장이 쓰러지고 보니까 웬디는 사모펀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패닉이었다. 집에서 운동가요 들으며 펑펑 울고, 강연하다가도 울컥했다. 내가 그동안 살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니 참 힘들더라.  

 

함께 싸우면서 그것을 몰랐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 하는 부분이 있다. 순간순간 속으로 '뜨악'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의 부정을 접하게 됐을 때는 '일부의 일탈이겠지' 또는 '보수 언론에서 음해하는 것이겠지'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조국 사태 때 그 모든 것이 모두 까뒤집어진 것이다. 옛날에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일부의 문제도 아니고 보수언론의 음해도 아니고 타락하고 새로운 기득권이 된 민주화 운동권의 민낯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8월 13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자녀 입시비리' 관련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선 조국 사태 이후에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그때만 해도 기대가 남아 있었다. 다만 대통령이 조국 문제를 빨리 결단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지층이 잘못된 길을 가고, 당심과 민심이 현저하게 분리되면 대통령이 윤리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라도 조국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는데, 안 하더라. 그리고는 이듬해 1월 기자회견에서 '마음의 빚'을 말했다. 그 순간 문 대통령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렸다.  

 

문재인 정부가 가장 잘못한 것은 뭔가? 부동산?다들 부동산을 꼽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건 그게 아니다. 민주당이 원래 갖고 있던 리버럴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김대중·노무현이 만든 정당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정당이 됐다. 당의 구성이나 커뮤니케이션, 의원들의 입법활동을 보면 도저히 진보라고는 할 수 없고 도리어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수평적 리더십이 아니라 수직적 리더십이다. 80년대 운동권들이 당을 장악하면서다.

 

노무현 정부까지는 운동권 정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수호하는 정당이었는데, 이해찬 전 대표를 중심으로 이념화된 586 운동권과 재야 세력이 들어오면서 자유민주주의와는 이질적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민주주의 정부의 시스템과 충돌하고 있다.

 

다만 이들을 과대평가할 것은 없는 게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징계가 잘 안 됐다. 조국이 아무리 장난을 쳐도 2심 재판은 정경심 교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언론중재법 시도도 실패했다. 전체주의적 방식으로 개혁 아닌 개혁을 밀어붙이다가 모두 좌초했다. 이런 것은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20년 1월 1일 ‘JTBC 신년토론’에 나와 토론을 벌이고 있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왼쪽)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전 이사장. 이날 방송에서 진 전 교수는 유 전 이사장과 설전을 벌였다. [JTBC 캡처]

 

 

과거 보수 정부와 비교해 지식인들이 침묵한다는 비판도 있다.사실 한국 학계에서 소위 '좌파'라고 하는 인사들이 과연 학문적 업적이 있었나. 이 사람들이 전공분야에서 실력이 없으니까 이상한 쪽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다가 정치권과 유착이 되고, 프로젝트를 따고 정부의 온갖 위원회에 들어가 자문을 해주고 있다.

 

학문은 객관성이다. 나도 좌파지만 기본적으로 학문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켜야 한다. 지키면 학자고 안 지키면 사이비다. 아무리 이게 옳다고 생각해도 거부할 수 없는 팩트는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다.

 

지금 문재인 정부나 민주당이 명백히 잘못하는 것들에 대해선 침묵하고 국민의힘 진영에서 잘못하면 200명씩 나와서 성명을 발표한다. 윤석열 부인 김건희씨의 논문 표절 문제를 봐라. 그게 교수들이 집단 성명을 낼 일인가. 절차에 맞춰 논문 표절 심사를 진행하면 된다. 솔직히 웃긴다. 언제 논문 표절로 교수들이 데모한 적 있나. 그럼 이재명 지사의 논문 표절은 왜 성명을 안 내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권혁재 기자

 

진 전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쉬운 듯 답변을 길게 이어갔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교수들의 성명 발표는 의미가 컸다. 4·19나 5공 시절엔 '우리 학생들 죽이지 말라'며 앞에 나서고 끌려갈 각오를 하고 용기를 낸 거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않나. 작은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저쪽에 타격을 줄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정말 교수들이 성명을 내겠다면 비정규직 처우 문제나 난민 혐오 등에 대해서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성명을 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한심하다. 보편적 인권은 외면하고 자기들이 '모시는' 소수의 정치인을 위해 성명을 낸다.

 

정작 사회적 민주화를 위해 지금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것은 소설가 김훈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것에 대해 열심히 글을 쓴다. 솔직히 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다. 김훈씨가 쓴 글들을 링크하는 것 외에 뭐했나. 나를 자괴감을 빠지게 하는 진짜 보수다. 한국의 보수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이거다. 진보 세력에게 진짜 타격을 입히고 싶으면 '진보, 너희들은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한 게 뭐냐' 할 수 있어야 한다.  

9월 10일 오후 서울 금천구 즐 스튜디오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국민 시그널 면접’에 참가한 윤석열 후보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이 면접 현장 화면에 중계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윤석열 지지자라는 공격도 있다.지지를 표명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내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 만난다. 안철수·원희룡·유승민·홍준표 다 만났다. 민주당도 와달라고 하면 가는데 그들이 안 부르는 거다. 국민의힘에서 공약 자체로만 보면 원희룡 후보가 준비를 많이 한 것 같고, 윤석열 후보가 가장 합리적이고 온건하다.

 

하지만, 대선 때도 윤석열 후보 안 찍을 거다. 요즘 정의당에 대한 관심은 없지만, 좌파인데 안 찍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민주당의 재집권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다. 그래서 과거와는 달리 보수세력의 집권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