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신다.” 반쪽으로 쪼개진 그릇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의 그릇이 되라는 메시지다. 선불교에도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에 석양이 지고 있다. 예수는 이 호수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⑬하느님은 왜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나?
#장면1
중국의 혜능대사는 늦은 나이에 출가했다. 정식 승려가 되기도 전에 행자(수련생)의 신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인 홍인대사는 그가 주위 사람들의 시기를 받을까 봐 걱정했다.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의 징표인 가사(袈裟, 승려가 장삼 위에 걸치는 옷)와 발우(절에서 쓰는 공양 그릇)를 전하며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 혜능은 밤을 틈타 남쪽으로 달아났다.
뒤늦게 이를 안 다른 수행자들은 분노했다. 아직 정식 승려도 되지 못한 행자 따위가 스승의 법맥을 잇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혜능의 뒤를 쫓아가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다들 지쳐서 중간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장수 출신의 혜명이라는 스님만이 대유령이라는 큰 고개까지 혜능을 쫓아왔다.
혜능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놓았다. 혜명이 그것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바위에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혜명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함이지 가사를 빼앗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발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주시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아침에 동이 트는 모습이다. 새벽이면 닭 우는 소리도 들린다.
그 말을 듣고 혜능이 답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때 어떤 것이 당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본성 또는 자성)인가.”
이 말을 듣고서 혜명은 크게 깨우쳤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혜능에게 큰절을 올렸다. “방금 하신 비밀스러운 말과 뜻 이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습니까?” 그러자 혜능이 답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대가 돌이켜 자신을 비추어보면(返照) 비밀은 바로 그대에게 있다.”
‘불사선악(不思善惡)’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선문답이다. 중국 송나라 때 선서(禪書)인 『무문관(無門關)』 23칙에 나오는 일화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애써도 쉽지 않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고 살 수가 있나. 생각을 하다 보면 선한 생각도 튀어나오고 악한 생각도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생각을 하지 말라니, 그게 어찌 가능할까. 어찌해야 불사선악을 실현할 수 있을까.
예수의 말씀에 힌트가 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신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을 비추지도 않고, 선한 사람을 비추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을 비출 뿐이다. 그래서 똑같이 비를 내린다. 여기에도 비가 내리고, 저기에도 비가 내린다. 비에 젖는 땅만큼 내 그릇의 크기도 드러난다.
장수 출신인 혜명은 힘도 무척 셌을 터이다. 그런데도 그가 돌 위에 놓인 가사와 발우를 들었을 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혜명의 안목이 ‘절반의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달마로부터 내려온 가사와 발우는 깨달음의 징표다. 그러니 ‘절반의 안목’으로는 가사와 발우를 들 수가 없다. 통째로 하나인 그릇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테러 위험이 감지되면 수시로 성문 출입을 제한한다.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원수가 하나씩 있다. 그럼 원수는 왜 생겨날까. 잣대 때문이다. 내가 가진 잣대의 왼쪽은 선, 오른쪽은 악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 원수를 사랑하면 어찌 될까. 선악을 가르던 잣대가 무너진다. 그 잣대가 무너지면 어찌 될까. 우리는 돌아간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간다.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라고 한 이유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선과 악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완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했다.
이제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원수를 사랑하는 일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그릇이 되는 것’이 목적이니 말이다. 골고루 비를 뿌리면 그 비에 젖는 땅만큼 내 그릇도 커질 테니 말이다.
아끼는 후배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할머니는 우리 집안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예수님을 모른 채 돌아가셨죠.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러잖아요. 예수님을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고요.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양심적으로 선하게 사셨어요. 그런데도 지옥으로 가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막막해요. 앞뒤가 안 풀려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지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후배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는다는 듯이. 그러고는 이렇게 답했다. “지옥이 지옥에 있겠죠.” 나는 다시 물었다. “지옥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하느님 밖’에 있다고 생각해?” 후배는 생각에 잠겼다. “지옥은 하느님 밖에 있잖아요. 천국이 하느님 안에 있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거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숨을 거둔 골고타 언덕에 세운 성묘교회. 그리스도교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순례지로 꼽힌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천국에만 비를 뿌리고, 지옥에는 비를 뿌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천국에만 해가 뜨고, 지옥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지옥은 ‘하느님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여기서 물음이 올라온다. 그분은 ‘큰 하느님’일까 아니면 ‘작은 하느님’일까. 그분은 ‘완전한 하느님’일까 아니면 ‘불완전한 하느님’일까. 그분은 ‘원수를 사랑하는 하느님’일까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하느님’일까. 요한복음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장 3절)라고 말한다. 거기서 지옥만 예외가 되는 걸까.
‘절반의 눈’을 가진 우리는 하느님까지 ‘절반의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작은 하느님’을 만들어놓고서 자기 그릇의 크기와 딱 맞는다며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절반의 그릇’에 꽉 차는 ‘절반의 하느님’을 보면서 말이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의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테이블에 놓인 것은 유대교 경전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 말은 명령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다. 우리가 닿지 못할 아득하기만 한 산봉우리도 아니다. 그 말은 반쪽짜리인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드는 ‘이치의 팁’이다. 그 팁이 우리의 그릇을 커지게 한다. 그렇게 그릇이 커질 때 만나게 되지 않을까.
예수가 설한 그 ‘텔레이오이’를 만나지 않을까.
※텔레이오이 : 그리스어로 ‘완전한’ ‘성숙한’을 뜻함.
짧은 생각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한 뒤,
유럽에는 그리스도교가 퍼졌습니다.
지금은 아메리카 대륙도 대부분 그리스도교를 믿습니다.
불교와 도교, 유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은 아시아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종교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과 좀 다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고,
이스라엘 땅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中東)입니다.
중동은 영어로도 ‘Middle East Asia’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서양 사람이 아니고,
아시아 사람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종교와 철학은 기본적으로 일원론(一原論)입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뿌리를 말합니다.
땅속의 뿌리와
땅 위에 올라온 줄기와 잎사귀가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몸이니까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철학은 이원론(二原論)입니다.
이원론은 다릅니다.
나와 너를 나누고,
본질과 현상을 나누고,
마음과 몸을 나누고,
아군과 적군을 나누고,
선과 악을 나눕니다.
땅속의 뿌리와
땅 위에 올라온 줄기와 잎사귀는
서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성경에서 설한 메시지는
철저하게 일원론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똑같이 해를 비춘다”고 했을까요.
그런데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원론의 종교가
서구의 이원론 철학으로
분석되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도 어느덧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세상을 선과 악으로 쪼개는 걸 더 선호합니다.
갈릴리 호수에 세워진 조각상. 조각상 안의 빈 공간이 갈릴리 호수의 모양이다. 그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합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45절, 48절)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중앙일보] 입력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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