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엔 영웅에 대한 예우가 있다
전쟁에서 인간은 가장 참혹한 순간들을 경험하고 사회는 그 비극을 통해서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순간에 숭고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그걸 영웅적 행위라 부르지만, 사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별들의 화려한 잔치나 거창한 이름으로 기록된 영웅의 역사가 아니다. 작고 힘없어 보이는 한 개인의 삶이 전쟁이라는 과정에서 빛나는 과정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바로 그 공동체가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에 따라 사회의 가치 달라진다.
해외 파병 미군
그런 점에서 봤을 때, 가장 놀라웠던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Taking Chance>라는 영화였다. 우리 말로는 ‘챈스 일병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2004년 이라크 전에서 사망했던 챈스 팰프스 일병의 시신이 담긴 운구가 델라웨어에 위치한 전사자 유해국에서 와이오밍 주의 한 작은 시골 마을까지 운송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였다.
이 영화가 놀랍고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일개 해병대 일병의 운구가 이송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숱한 사람들의 숭고한 마음자세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담담한 어조로 운구의 이송을 책임졌던 미 해병대 마이클 스트로블 중령의 시선을 스크린에 옮겨 놓고 있다.
영화가 개봉한 것은 2009년, 챈스 일병이 사망한 뒤 5년이 지난 시점에 만들어진 셈이다. 사실 이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실존 인물 마이클 스트로블 중령이 어느 지방지에 기고한 작은 기사 하나가 계기가 되었다.
‘A Marines’ Journey Home’, ‘어느 해병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자신이 담당했던 운구 이송 과정에서 그가 만났던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달해준 소박하고 정성 어린 마음의 기록이기도 했다.
“챈스 일병에 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의 운구가 이송되는 과정 동안 그는 혼자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 역시 혼자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디테일하게 전쟁에서 사망한 한 해병의 유해와 그가 마지막 세상에 남겨 놓았던 유품들이 처리되는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피에 물든 시신에서부터 군화의 핏자국까지 정성을 다해서 깨끗이 처리되는 과정들,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그의 목에 걸려 있었던 여행자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성 크리스토퍼 메달과 이라크 시각에 맞춰져 멈춰 선 손목시계를 포함해서 전사자의 부모에게 전달될 작은 사물들이 하나하나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운구를 이송하는 마이클 스트로블 중령의 시선으로 이동한다. 그가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한 미군의 죽음과 그의 시신이 담겨 있는 운구를 대하고 있는지를 묵묵히 관찰한다. 공항에 도착해서 안전모를 벗고 운구가 비행기 화물칸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최대한의 예우를 해주는 공항 노무자들에서부터 먼 여정에 몸이라도 편하게 다녀오라며 이코노미 좌석을 퍼스트 클래스로 업그레이드 해주었던 항공사 직원의 따듯한 모습들이 순서대로 이어진다.
기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미션을 알고 있는 듯이 따듯하게 다가와 한 마디씩 위로를 전한다. 한 여승무원은 자신이 늘 간직하고 있었던 작은 십자가상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고향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미군의 유해가 담긴 운구차를 발견한 차량들이 전조등을 켠 채로 추월도 하지 않고 묵묵히 뒤를 따르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영화는 그렇게 미국이라는 사회가 어떻게 한 이름 없는 평범한 미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지, 그 죽음의 의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한 국가가 자신의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희생한 사람들을 어떻게 예우하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다.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전달되는 전사 통보서’
이라크전이 한창이던 2010년경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미군에 입대하는 일들이 많았다. 학비도 제공받고 복무 후에는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미국 시민권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원을 하는 경우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미군에 입대한 한국 청년들이 많아지면서 전사자들도 늘어났다. 자연히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캘리포니아, 텍사스, 미시간 등에서도 자식의 사망 통지서를 전달받고 슬퍼하는 교민들의 모습이 많이 목격되었다.
정복을 갖춰 입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미군의 모습의 등장할 때마다 주민들은 그곳에 누군가의 가족 중에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전사 통지서가 늦은 밤이나 새벽을 가리지 않고 전달된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매너를 존중하는 미국인들의 생활 문화를 놓고 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조치였다. 도대체 그들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그토록 신속하게 전사자 통보를 가족에게 알리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미군 전사통보는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미 국방부 전사자 예우 담당국에서 처리한다.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족에게 전사 통보서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들이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미국 지도를 펼치면 알 수 있듯이 세인트루이스는 미국의 중앙에 있는 도시다. 미국 어느 곳이든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엔 낮과 밤, 새벽의 구분이 없다. 무조건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다 보니 이라크 전이 한창일 때는 전쟁터에 자식을 보낸 부모의 경우 새벽에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기라도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한다. 미군 전사 통보서는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 시간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좀 무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자료를 찾아봤다. 누군가 군사전문 사이트에 올려놓았던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의 전사자 예우의 사례를 대비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으며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았다.
‘천안함 폭침 당시 몇몇 유가족들은 아들의 실종 사실을 뉴스를 통해서 알았다. 지난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우리나라 해병대원 두 명이 전사한 일이 있었다. 그때 두 해병대원의 유가족들은 전화로 전사통지를 받았다.
미국은 전사자의 유가족들에게 운구 담당 장교가 직접 방문하여 전사를 통보하고 미 국방장관의 서명이 들어간 전사 통지서를 전달하게 된다. 시신 운구부터 장례까지 모두 책임지고 실행한다. 또한 유가족들에게 전사를 통보하고 난 후에야 언론보도를 할 수 있다. 언론보도로 아들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된 우리나라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과연 자식의 사망 통지를 전화나 TV 뉴스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실제로 2002년 연평해전이 일어난 뒤 현장에서 취재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도 유가족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된 전사자들을 대하는 정부의 성의 없는 태도때문에 많은 이들이 슬픔보다 더한 치욕을 견뎌야 했다. 자신의 돈으로 치료비를 감당해야 했고 심지어 죽음 자체가 조롱(?)이 되기도 했다. 한 희생자의 부인은 심한 배신감을 견디지 못해 조국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모욕과 조롱 섞인 담론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며칠 전 일이다. 정부 여당의 부대변인을 역임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천안함 함장이 부하들을 수장시켰다’라는 발언은 많은 국민들, 그리고 천안함으로 유명을 달리한 전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입혔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부하를 잃어버린 지휘관에게 그보다 더 잔인한 말이 또 있을까.
단순한 비교지만 미국과 한국의 두 가지 시선을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우리 사회는 왜 제복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예우를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무는 슬픔을 명예롭게 지켜주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작은 시작을 해낼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관이 열렸고 저는 챈스 팰프스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의 유니폼은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도버 해병대 전사자 유해국의 전문성에 감탄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그가 가슴에 여섯 개의 약식 훈장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장 높은 것은 그의 퍼플 하트 훈장이었습니다. 나는 쿠웨이트 전을 포함해서 17년 동안 해병으로 근무하면서 8개의 훈장을 받았지만 군단에서 1년밖에 근무하지 않은 해병의 가슴에는 여섯 개의 훈장이 달려 있었습니다.” (‘어느 해병의 귀환’ 중에서)
퍼플 하트는 미군 전사자를 위해서 미국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가장 오래되고 명예를 자랑하는 훈장이다. 계속해서 마이클 중령의 글은 한 해병의 죽음에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정성 어린 사람들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공항의 직원들과 항공사 여승무원의 친절과 배려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들이 도버에서 필라델피아, 미니애폴리스, 그리고 이곳 와이오밍까지 이르는 길에서 어떻게 한 해병의 죽음과 상실에 대해서 슬퍼하고 함께 했는지 그들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마이클 중령은 챈스 일병의 유품을 전달하는 과정도 자세하게 기록에 남겨 놓았다. 특히 비행기를 탔을 때 자신에게 위로의 인사와 함께 여승무원이 전달해주었던 작은 십자가 상도 잊지 않았다. 그 작은 십자가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늘 자신의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도 전했다. 그저 작은 십자가 하나였을 뿐인데... 그리고 장례식이 열리던 날 챈스 일병의 어머니는 여승무원이 주었다는 십자가를 옷깃에 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두 명의 해병이 관에서 성조기를 벗겨서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접었습니다. 의식이 끝났을 때 챈스의 아버지는 베트남에서 자신이 받은 훈장을 아들의 관 위에 꽂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블라우스에서 무언가를 떼어내서 관에 꽂는 것도 보였습니다. 나는 나중에 그것이 바로 여승무원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챈스를 기억했던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무덤에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어느 해병의 귀환’이라는 제목의 글은 그렇게 끝을 맺고 있다. 글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의 글은 소리 없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로 승화되었다. 그것이 한 사회가 어느 이름 없는 병사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김덕영 <최보식의언론>논설위원 조선일보 입력 2021.06.13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는 평평” 외치는 음모론자들, 무시만 해선 안되는 이유 (0) | 2021.09.14 |
---|---|
아직도 뉴욕에 이런 일이... 목숨 걸고 탈출한 19세 소녀 이야기 (0) | 2021.08.12 |
알래스카서 멕시코까지… 스쿨버스 타고 떠난 행복 원정대 [왓칭] (0) | 2021.05.04 |
우울증을 겪던 중년 남성이 365일 문어를 따라다니자 벌어진 일 [왓칭] (0) | 2021.02.23 |
5000원 내면 폰으로 100편 본다, 526편 출품 울주산악영화제 (0) | 2020.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