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증명서도 없던 소녀의 기적…"배움은 나를 찾는 투쟁"

해암도 2020. 1. 12. 06:31


배움의 발견 /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펴냄 / 1만8000원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수험생 자녀에게 "이런 애도 있는데 열심히 해야지"라고 주문한다면 당신의 문해력은 `빵점`이다. 한국을 뒤흔든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나 `7막 7장`을 이 책에 덧대면서 "막노동해서 학비 벌라는 것도, 교과서 달달 외워 선생님한테 잘 보이란 것도 아니잖니"라고 잔소리한다면 당신의 지적 수준부터 고민해봐야 한다.

폐철 처리장에서 고철을 압축하던 한 소녀가 `골방의 독학`으로 대학에 진학해 최우수로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하버드대 방문연구원을 거쳐 케임브리지 박사로 홀로 서는 이야기, 그 결과 타임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된 한 젊은 미국 여성의 기막힌 생이 책으로 꿰매졌다.

출생증명서 한 장에서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출발한다.
저자의 부친은 `심판의 날`을 예비하는 광신도였다. 인간의 세상이 망한다 해도 피신용 가방과 4000ℓ를 비축한 연료탱크가 든든했다. 그에게 현대의학은 "정조를 파는 행위"였고 약초만이 "주님의 약국"이었다. 모친조차 자궁 수축엔 백당나무 껍질과 익모초를 쓰는 산파의 조수 일을 자처했다.

예언자의 표정인 부모는 홈스쿨링을 가장해 일곱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공교육은 아이들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정부의 음모"였고 그래서 학교는 `주일 학교`가 전부였다. 방치에 가까운, 토템 세계의 거주민이었다. 가정 분만으로 태어났고 의사를 만난 역사가 없으니 출생증명서 따윈 없었다. 학적부와 의료기록이 부재하니 칠남매 중 넷은 정부가 존재도 몰랐다. 저자의 생부만이 "정부가 강제로 자녀를 학교에 가도록 만들까봐" 전전긍긍했다.

사후 출생증명서를 저자는 9세 때 손에 쥐었다. 학대와 폭력도 삶의 정면이었다. 저자의 오빠 숀은 "동생의 몸 전체를 번쩍 들어 올린 다음 팔을 등 뒤로 꺾어 변기에 집어넣는" 괴물이었고, 그 괴물은 립글로스를 바른 저자를 "창녀"라고 불렀다. 삶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없어 보였다.

구원은 근거리에서 찾아왔다. 저항하며 탈주를 꿈꾸던 저자의 다른 오빠 타일러였다. "대학이 뭐야?"라는 가족을 버리고 타일러 오빠는 대학에 갔다. 저자 나이 16세, 두 갈래 길이 저자에게 주어졌다. 19세쯤 결혼해 아버지가 떼어준 농장에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과 약초를 키우는 삶과 대입자격시험(ACT)을 치르고 `나`를 찾는 삶의 갈림길이었다. 수중에는 800달러가 전부였지만 공부를 시작했다. 분수부터 공부해 사인, 코사인, 탄젠트의 세계에서 법칙과 이성의 문을 열었고 영어, 과학, 독해를 독파했다.

ACT 시험장에서 OMR카드를 처음 보고는 "어떻게 쓰는 거죠?"라고 묻던 저자는 상위 10%에 가까운 28점을 받아 브리검 영 대학에 입학했다. 눈부신 교정의 풍경이 펼쳐지며 생은 뒤집혔다. 위기도 있었다. 강의 도중 단어 `홀로코스트`란 단어를 처음 보고 "이 단어를 모르겠어요"라고 물어 비난받았고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철자를 `Caravajio`로 썼다가 지운 뒤 `Carrevagio`로 다시 썼다가 볼 것도 없이 낙제했다. 그러나 결국 저자는 최우수 학부생 졸업장을 손에 거머쥐었다.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던 케임브리지대에서 생은 또 돌변했다. 나선형 계단과 돌난간으로 둘러싸인 지붕 아래에서 만난 한 노교수는 저자의 삶에 이미 깊은 감동을 받았다. 교수는 이 잡듯이 저자의 에세이를 읽으며 글쓰기부터 다시 가르쳤다. 머지않아 교수가 물었다. "하버드에 가겠는가, 케임브리지를 선호하는가…." 입이 떡 벌어진 채 돈이 없어 대학원은 힘들다는 저자에게 교수는 재차 말했다. "등록금 걱정은 내게 맡기게." 하버드대에서 독일 이상주의, 세속주의의 역사, 윤리학과 법학, 불어와 목판화를 공부하던 저자는 다시 케임브리지대로 돌아가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쓴다. 2018년 전미비평가협회 회고록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이 책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기술고문이 서평을 썼고 아마존, 워싱턴포스트, 오프라 매거진, 타임,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스, 퍼블리셔스 위클리, 블룸버그, 뉴욕포스트에서 모두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식어가는 카레 앞에서 "세계의 멸망"을 설교하던 아버지를 뒀고 운명대로였다면 `약초 빻는 산파`가 됐을 저자가 비이성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세계의 중심에 서버린 셈이다.

세계의 모든 자를 "믿지 않는 이방인"이라 불렀지만 실은 자신들이야말로 이방인이었던 부모를 또 차마 외면하지는 못해 하버드대 교정을 함께 거닐며 고민하는 이야기도 묵직하다. 무지몽매한 집단에의 계몽서가 아니라 이 책의 원제 `Educated`처럼 학문의 의미를 고민하는 책임도 분명히 해둬야겠다.

영국 철학자 이사야 벌린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배움은 곧 자유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축약해 옮기면 이렇다. "배움은 자유를 얻는 행위다. 배움은 자신의 주인됨이다.

배움은 스스로를 다스리는 길이다." 참고로 7남매 중 집을 떠난 셋은 모두 아이비리그 박사가 됐다. 해묵은 위인의 전기 같겠지만 머나먼 전설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1986년생, 올해 서른넷이다. 


매일경제   김유태 기자       입력 : 2020.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