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중국 전통 과학’이 몰락한 이유

해암도 2019. 4. 6. 05:55

英과학자 조지프 니덤, 중국인 여자친구 위해 中 과학사 연구 돌입 


서구 문명 능가했던 중국의 전통과학은 왜 근대 과학으로 발전 못했나?

영국 과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중국에 과학이 없다는 20세기 유럽 전역의 인식을 뒤집은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통해 중국 과학의 탁월한 성과를 서구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사진 왼쪽부터 루 구이전, 조지프 니덤, 도로시 니덤. 사진 = publicseminar

영국 과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은 중국에 과학이 없다는 20세기 유럽 전역의 인식을 뒤집은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통해 중국 과학의 탁월한 성과를 서구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사진 왼쪽부터 루 구이전, 조지프 니덤, 도로시 니덤. 사진 = publicseminar


 1840년 아편전쟁 전까지 중국은 유럽에 있어 미지와 낭만의 이상향이었다. 청나라 강희제 재위시절을 두고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실현한 표본국가라 치켜세웠고, 차와 도자기를 사들이려 미국과 같은 식민지에서 침탈한 금과 은을 고스란히 중국에 갖다 바쳤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와 유럽의 막대한 무역 손실이 맞물리자 이내 중국은 구시대적 동양 문명의 상징이자 적대국으로 인식됐고, 아편을 둘러싼 마찰 이후 청의 군사력이 별 볼 일 없음을 간파한 영국은 군사 4000명으로 청의 대군을 손쉽게 물리쳤다. 이후 서양은 중국을 포함한 동양을 철저하게 의시하고 무시했다. 실로 영국의 역사학자 조지프 니덤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발표하기 전까지 영국, 그리고 유럽은 동아시아에 과학은 없거나 발전되지 않았다고 경단했다. 


1900년 의사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의 외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조지프 니덤은 의학 공부를 작파하고 전공을 화학으로 선회, 케임브리지 대학 생화학연구소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전도유망한 학자였다. 함께 연구하던 동료 도로시를 아내로 맞은 뒤, 왕립 학회 회원으로 부부가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등 안정적 삶을 보장받은 그의 인생 지침을 돌려놓은 건 다름 아닌 중국에서 온 유학생 루구이전과의 만남이었다.


네 살 연하 중국 여인에 대한 사랑은 아내와 연구소를 뛰어넘어 그녀의 조국인 중국과 그 과학사로 확장됐고, 그녀에게 중국어를 배운 니덤은 연인이 줄곧 강조한 “야만적이고 수수께끼로 가득한 제국의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말에 홀린 듯 1942년 중국 충칭으로 향했다. 중영 과학 연구 사무소 대표로 재직하며 중국 과학계 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유럽이 낮잡아 본 중국 과학사 연구 자료를 쉼 없이 수집해나간 그는 17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 계기로 꼽은 기술인 인쇄술과 화약, 그리고 나침반이 기실 중국의 발명이었음을 발견한다. 


868년에 목판 인쇄된 금강경 두루마리를 확인하기 위해 둔황의 동굴로 향하고, 최초의 자기 나침반을 사용했다는 중국 배에 대한 1090년의 기록을 추적 끝에 찾아냈는가 하면, 중앙 연구원 역사 연구소에서 2세기에 폭죽을 만들었고 1076년엔 타타르에 화약 판매를 금지한 칙령에 대한 구절을 찾아낸 니덤의 기록 채굴 작업은 이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중국에서 유래했음을 밝혀내기 위한 탐구로 이어졌다. 중국에 머문 3년 동안 그가 다닌 원정길은 4만8000km에 이르렀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인 1만 2800km의 4배에 달하는 집념의 여정이었다. 니덤은 중일전쟁을 피해 윈난, 신장, 쓰촨 등 오지로 몸을 숨긴 중국의 과학자들을 찾아 지원하는 동시에 아편전쟁 이후 잊혀진 중국의 세련된 문명의 원형질을 하나하나 찾아 나섰다. 


오랫동안 유럽 발명가의 전유물로 알려진 기술들이 사실은 훨씬 오래전 중국의 창시자들에 빚지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곧 ‘니덤 문제’로 불리는 유명한 질문을 던지기에 이른다. “13세기까지 서구 문명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에 있던 중국의 전통 과학은 왜 근대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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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극의 경제학자 Justin Y. Lin은 니덤 문제에 대한 논문 ‘왜 산업혁명은 중국에서 비롯되지 않았나’에서 중국이 ‘경험에 기초한 기술 발명’을 ‘과학과 결부된 실험에 기초한 기술 혁신’으로 이어가지 못한데 반해 유럽은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그 이동에 성공했고, 니덤 역시 유럽의 과학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중국이 유럽과의 과학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었음을 발견했다고 분석한다.


[김희윤의 책섶] 뛰어난 ‘중국 전통 과학’이 몰락한 이유

세상의 중심이 중국이며 영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를 오랑캐이자 조공국 쯤으로 여긴 뿌리 깊은 화이사상(華夷思想)이 중국의 과학기술 혁신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을까? 건륭제가 매카트니 경에게 건넨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노라. 짐에게는 너희 나라의 제조품이 아무 소용도 없느니라” 속 자신감의 배경이 된 증거에 천착한 니덤의 행보는 중국에서의 4년을 지나 반세기에 걸친 그의 이후 생애를 좌우한 궁구가 됐다.


이때 수집한 자료를 풀어내는 데 그가 쏟아부은 시간만 65년, 이를 책으로 내고자 한 그는 출판사에 보낸 ‘극비’ 계획서에서 “이것은 중국학자를 위한 책도 아니고, 일반 대중을 위한 책도 아니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대신 “과학 사상과 기술의 역사에 대하여, 또한 그러한 역사와 문명의 전반적인 관련성에 대하여, 특히 아시아와 유럽의 상대적 발전에 대해 관심을 가진 모든 교양 있는 (과학자일수도, 아닐 수도 있는) 독자를 위한 책이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런 그의 계획은 총 1만 6000여 쪽, 7권 25책으로 그가 사망한 오늘까지도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는 책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로 그 결실을 맺었다. 


1954년 그가 ‘중국의 과학과 문명’ 1권을 내놓자 전 세계 과학계는 뜨거운 반응으로 화답했다. 사학자가 아닌 화학자가 순수과학 밖에서 이뤄낸 위대한 성취에 많은 이들은 열광했고, 특히 근대과학의 거의 모든 연구 주제를 유럽이 독점하던 시절 고착화된 유럽중심주의와 서양우월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유럽 너머의 국가에서 이뤄진 과학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아울러 그리스 과학을 추켜세우며 모든 근대과학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과학 자체가 유럽에서 나왔다고 굳게 믿는 이들의 ‘지적 자만심’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다만 ‘니덤 문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근대과학을 보편 과학이라 상정하고, 중국을 비롯한 유럽 바깥의 전통 과학이 근대과학에 수렴될 것을 예단한 그의 입장 역시 유럽의 잣대로 중국 과학의 역사를 재단하는 왜곡된 시선임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니덤 이전의 무수했던 서구의 탐험가나 선교사조차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에 대한 치열하고도 치밀한 모험과 연구의 여정은 한 사람의 생화학자를 중국 전문가이자 역사학자로 변모시켜 방대한 저작을 이룩했고, 그 계기가 된 깊은 사랑의 대상 또한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마지막 2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젊은 날, 한순간의 사로잡힘이 바꾼 한 과학자의 궤적을 촘촘히 기록해 낸 이 책은, 그의 위대한 사랑이자 세기의 저작물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가감 없이 생생히 재현해내고 있다.  


〈중국을 사랑한 남자(조지프 니덤 평전)/사이먼 윈체스터/사이언스북스/2만20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최종수정 2019.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