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영화 ‘인터스텔라’가 그려낸 지구의 미래를 떠올려보자. 스크린 속 지구는 병충해 탓에 옥수수를 제외하면 그 어떤 작물도 재배할 수 없는 을씨년스러운 별이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엔 연일 뿌연 먼지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주야장천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받는다. 결국 해법은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건 별동대 성격을 띤 우주비행사들이 지구 밖 피난처를 찾는 거였다.
그런데 영화 속 설정처럼 언젠가 지구가 결딴날 운명이라면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이들에겐 얼마간 황당하게 여겨질 상상이지만, 오랫동안 우주론 분야에서 으뜸가는 학자였던 스티븐 호킹(1942~2018)은 정색하고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우주로 널리 퍼져나가는 것만이 우리 스스로를 구할 유일한 길”이라고.
이 같은 메시지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호킹의 유작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에 비중 있게 실려 있다. 책에서 ‘제2의 지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문장은 한두 개가 아니다. “지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무인도의 조난자들이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주로 가는 비용이 저렴하지는 않지만 세계 전체 차원에 비해서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다” “이곳(지구)에 계속 머무른다면, 우리는 소멸될 위기에 처할 것이다”….
호킹이 우주 탐사의 필요성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이유는 지구 멸망의 징후가 수두룩해서다. “온실 효과와 지구 온난화는 궁극적으로 지구의 기후를 매우 뜨겁고 황산비가 내리는 섭씨 250도의 금성처럼” 만들어버릴 개연성이 충분하다. 핵전쟁이 일어나거나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호킹은 “앞으로 1000년 안에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지구가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처럼 ‘호킹의…’에는 석학의 지엄한 당부가 담긴,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가 요소요소에 등장한다. 예컨대 인공지능(AI) 문제를 살핀 대목을 보자. AI에 대한 학자들의 전망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AI가 인류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낙관이 있는가 하면, AI가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처럼 인류 문명을 폭파시키는 뇌관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호킹은 중간자적 입장을 취한다. “AI도 인간과 조화를 이루며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간 비관적인 뉘앙스를 띤 대목들도 만날 수 있는데, 이런 문답이 대표적이다.
“인공지능에 대해서 왜 그렇게 걱정을 하는 건가요. 인간은 언제라도 플러그를 뽑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컴퓨터에 물었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러자 컴퓨터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존재합니다.’ (컴퓨터는) 그러고는 플러그를 녹여버렸습니다.”
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반인에겐 요령부득처럼 여겨지는 거대한 질문(Big Question) 10개에 대한 호킹의 답변을 갈무리해놓고 있다. ‘신은 존재하는가’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시간여행은 가능한가’….
호킹은 명성이 대단했던 만큼 생전에 이런 질문들을 자주 받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연설이나 인터뷰나 책을 통해 나름의 답변을 내놓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답변을 자료로 만들어 보관했다고 한다. ‘호킹의…’은 그가 오랫동안 쟁여놨던 자료들을 깁고 엮어 완성한 책이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챕터는 크리스천 독자에겐 껄끄럽게 여겨질 것 같다. 호킹은 창조론을 부정한 학자였다. 우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세상이 만들어진 시기로 돌아가면 우주는 하나의 점이었고, 이 점이 어느 순간 빅뱅을 일으켜 우주가 탄생했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문제는 ①빅뱅의 원인을, ②빅뱅 이전의 상태를 과학자들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자들은 이 점을 지적하면서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해왔다.
호킹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자연의 법칙은 우주가 양성자처럼 외부 도움 없이 혼자 튀어나와 존재할 수 있고, …빅뱅의 원인 그 자체도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빅뱅 이전엔 무엇이 존재했을까. 빅뱅 직전의 우주는 밀도가 아주 높은 블랙홀이었다는 게 호킹의 추론이다. 중력이 엄청난 블랙홀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 탄생의) 원인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었다. 나에게 그것은 창조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창조자가 존재할 시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호킹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호킹의 후배들은 언젠가 호킹의 주장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
아주 참신한 내용이 담긴 책이라고 치켜세우긴 힘들 것 같다. 누군가 한 듯한 이야기,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이 곳곳에 등장한다. 특이한 건 얼마간 진부한 이야기가 담겼는데도 따분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호킹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학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숭고한 삶을 되새기게 만든다는 점도 이 책이 선사하는 감동이다.
알려졌다시피 호킹은 스물한 살 나이에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다. 당시 의사는 그가 5년 밖에 못 살 거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호킹은 좌절하지 않았다. 불굴의 투지로 그 누구도 밝히지 못한 우주의 난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이 책의 끄트머리엔 호킹이 인류를 향해 띄우는, 감동적인 당부의 메시지가 실려 있다.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자. 눈으로 보는 것을 이해하려 하고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도록 노력하자. 상상력을 가지자.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세상에는 해낼 수 있고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일이 언제나 있다. 미래를 만들어나가자.”
지난해 3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스물한 살 때 온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된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에 이렇게 적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 열심히 살고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AP뉴시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입력 : 2019-01-12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