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세계사 여덟번의 혁명 - 파푸아에선 여자가 죽은 남자 먹어

해암도 2018. 10. 20. 08:48

동물의 胃, 말의 안장… 요리의 첫 아이디어가 나온 곳

인류가 사육한 첫 동물은 달팽이 파푸아에선 여자가 죽은 남자 먹어

음식의 세계사 여덟번의 혁명|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유나영 옮김|소와당|500쪽|2만8000원

날음식에 변화를 가하는 게 조리(調理)라면 첫 조리는 사냥터에서 사로잡은 동물의 위(胃)에서 시작됐다. 먼 옛날 사냥꾼들은 죽은 짐승의 위에서 먹기 좋게 반쯤 소화된 다른 동물을 꺼내 생고기에선 느낄 수 없는 색다른 풍미를 즐겼다. 인류가 최초로 사육한 동물은 네발 달린 짐승이 아니라 달팽이였고,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초콜릿 회사 사장 윌리 웡카의 모델은 허시 초콜릿 창업자이자 인심 좋은 자선사업가 밀턴 허시였다.

혀만 자극하기엔 맛의 매력이 너무 강력하다. 인간이 요리를 발명한 이후 맛은 혀를 벗어나 눈을 즐겁게 하는 온갖 차림법을 만들었고, 귀를 사로잡는 유혹의 소리를 찾아냈다. 미국 노터데임대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저자는 여기에 '맛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했다. 저자는 음식의 역사에 관련된 다양한 사료(史料)를 조리의 발명, 의례화, 사육, 농업, 계층화, 무역, 생태교환, 산업화 등 8개 주제로 분류한 뒤 맛의 천일야화(千一夜話)를 펼친다.

유목민은 말 안장도 주방으로 썼다. 그들은 안장 밑에 고기를 넣고 걸터앉아 초원을 달렸다. 인간 몸무게의 압력과 말이 흘린 땀으로 조리된 고기는 부드러운 감칠맛이 더해져서 입안에 녹아들었다. 불[火]은 배신자가 누설한 올림포스산의 비밀이다. 불이 요리에 쓰이면서 인류는 비로소 문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시간 약속을 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이 모닥불 주변에서 만들어졌다. 불에 익힌 요리를 먹는 동안 솟아나는 기쁨과 유대감을 나누며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다.

식인(食人)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오싹한 흥미를 선사한다. 책은 더 나아가 식인의 심리까지 탐색한다. 식인종조차도 배고파서 인육을 먹는 경우는 드물다. 파푸아뉴기니 고지대의 기미족(族) 여성들은 1960년대까지도 죽은 남자를 먹었다. 산 남자와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된 상실을 그를 먹음으로써 해소하려 했다. 여자들은 말했다. "남자를 썩게 내버려둘 수 없어…내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게 나아!"


저자는 현대인의 식탁에도 음식에 대한 미신적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미밥과 특정 과일·채소를 날로 먹으면 도(道)를 이루고 질병 없이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음식에 주술적 의미를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식인의 심리와 다를 게 없다.

지배계층이 남아도는 음식을 통치에 활용한 사례들은 낭비의 엄청난 규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다. 기원전 9세기 메소포타미아 권력자들은 열흘간의 궁중 연회에 암소 1000마리, 양 1만4000마리, 비둘기 2만 마리, 사막 쥐 1만 마리 등을 식탁에 올리는 것으로 세력을 과시했다. 탐식과 미식에 대한 호불호의 뿌리도 깊다. '로마 건국사'를 쓴 고대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는 "연회가 정교해진 시점부터 로마제국의 쇠퇴가 시작됐다"고 경고했다. 반면 18세기 초 프랑스의 유명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조물주는 우리에게 살고 싶으면 먹으라고 명령했고, 이를 식욕으로 유인해 맛으로 격려하고 쾌락으로 보상했다"고 미식을 옹호했다.

음식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상의 풍경마저 바꿨다. 과거 농경과 목축이 불가능한 땅이었던 북미 대평원은 오늘날 '세계의 빵 바구니'로 변모했고, 북미 대평원보다 더 열악한 불모지였던 남미의 팜파스 초원은 세계적인 육우단지로 탈바꿈했다. 유럽 침략자들이 양과 소를 먹기 위해 함께 들여온 사료용 목초를 재배한 뒤의 일이다.

오늘날 농업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화이다. 산업화된 식단이 풍요만 선사한 것은 아니다. 150년 전 출간된 에드워드 벨러미 소설 '뒤돌아보며'는 부엌 없는 가정을 유토피아로 그렸다. 부엌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신문에 실린 메뉴를 보고 식사를 주문한 뒤 인민궁전에서 먹었다. 이 상상은 오늘날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각자 다른 메뉴를 골라 서로 다른 시간에 혼밥하는 것으로 실현됐다. 책은 산업화 이후 음식이 탈(脫)사회화, 탈가정화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패스트푸드와 전자레인지를 공범으로 꼽는다. 저자는 "가족이 하루 한 끼만 함께 둘러앉아 먹을 수 있어도 전통적 가정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인류가 모닥불과 냄비, 식탁을 둘러싸고 지난 15만 년 동안 쌓아온 유대의 탑이 지금처럼 위태로워 보인 적이 없다.



기고자 :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조선일보 2018-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