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둔 그에게 위안을 준 '죽음학 박사'의 이 말

해암도 2018. 9. 15. 06:03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16)  

  
나는 나이 40대 중반에 정기 건강검사를 받았는데 암표지자의 수치가 기준보다 높게 나왔다. 담당 의사는 암이 우려된다며 조직검사를 권했다. 며칠 후 결과가 나왔는데,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죽음을 남의 일로만 알았던 나도 죽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 죽음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죽음 관련 책을 찾아보았다.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사진 청미 출판사 페이스북]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지음. [사진 청미 출판사 페이스북]

 
연명 의료를 둘러싼 논란이 일면서 요즘엔 관련 책이 많이 나와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죽음을 다룬 책이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인간의 죽음'(On Death and Dying)』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미국 호스피스계의 대모이자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쓴 책이다. 검색해보니 교보문고에 재고가 딱 한권 있었다. 나는 서둘러 가서 그 책을 샀다.
 
죽음을 통보받은 사람의 5단계 반응  
 
로스 박사는 사람들이 죽음을 통고받으면 통상 다섯 단계의 감정변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죽지만 늘 남의 일로만 여겼지 자기가 죽는다는 건 평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다음에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왜 내가 죽어야 하지. 나는 지금까지 고생만 하다 이제 겨우 살 만해졌는데”라며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무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법이다. 세 번째에 나타나는 반응은 타협이다. 신과 협상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 제가 죽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한 1년만 죽음을 연장해주십시오”라며 신에게 청한다.
 
사람들이 죽음을 통고받으면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 다섯 단계의 감정 변화를 거친다. [사진 pixabay]

사람들이 죽음을 통고받으면 '부정-분노-타협-절망-수용' 다섯 단계의 감정 변화를 거친다. [사진 pixabay]

 
얼마 안 가 그것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는다. 네 번째에 나타나는 반응은 절망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낙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다섯 가지 단계를 거치는 건 아니다. 영성이 높은 사람은 즉각 마지막 단계로 들어간다.
 
『인간의 죽음』을 읽고 죽음에 관한 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에 출판된 로스 박사의 책은 거의 읽었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 태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생명에 관심이 많았다. 자서전을 보면 스위스도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였다. 그의 집안에서 아버지의 뜻은 절대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의사의 길을 걷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회계 일을 도우라고 지시한다. 그는 제 뜻을 고집했고 결국 집을 나와야 했다.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그는 의사가 돼 죽어가는 사람을 돕기 시작한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것은 동료 의사들이 죽음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학생들을 상대로 죽음 강의를 시작한다. 그 후 동료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세인들의 입에 오르게 된다. 책은 이런 과정을 엮은 것이다. 타임지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그를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하나로 선정했다.
 
호스피스 과정을 공부할 때 살펴보니 환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고 죽어가는 과정과 죽은 이후에 자신이 사멸된다는 점이었다. 로스 박사는 ‘근사체험(임종에 가까웠을 때 혹은 일시적으로 뇌와 심장 기능이 정지해 생물학적으로 사망한 상태에서 사후세계를 경험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을 스스로 경험하고 임종 환자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했다. 죽음으로서 우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로 갈 뿐이라고 주장했다.
 
죽음은 다른 세계로의 이동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다. 마치 애벌레가 옷을 벗고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지구 상에 살다가 원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로스 박사의 주장은 임종 환자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사진 pixabay]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다. 마치 애벌레가 옷을 벗고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지구 상에 살다가 원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로스 박사의 주장은 임종 환자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사진 pixabay]

 
어린 환자가 이해하기 쉽게 죽음은 애벌레가 옷을 벗고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인간을 다른 별에서 지구로 소풍 온 존재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지구 상에서 즐겁게 놀다가 원래 본향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임종 환자에게 큰 위안이 됐다.
 
말년에 사지가 마비되며 죽음을 직면하는 경험으로 쓴 자서전에서 “사람들은 나를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지만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나의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라고 했다.
 
죽음은 사실 두렵고 회피하고 싶은 단어다.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부정적인 내세관 때문이다. 그러나 로스 박사의 주장처럼 죽음이 다른 세계로의 이동일 수도 있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인지,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후자를 선택해 마음이 편해진다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은퇴를 준비하며 죽음에 관해 공부하기를 권한다. 살아생전 미리 공부하면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이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아가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을 성찰하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깨닫게 되는데 그건 죽음 공부가 주는 덤이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manjoy@naver.com    [중앙일보] 입력 201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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