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드 <중> 집념의 공작활동
모사드 집념의 작전으로 위협 제거
유대인을 해친 자는 용서하지 않아
72년 뮌헨올림픽 선수단 학살되자
9년간 ‘신의 복수’ 작전 벌여 보복
전화폭탄, 침대폭탄, 근거리 저격
선혈낭자 특수공작의 교과서 완성
시리아 고위층 침투해 정보수집
6일전쟁 골란고원 10시간에 점령
스파이 엘리 코헨은 전쟁 전 처형
유해 환국 작전 지금도 계속 진행
모사드는 ‘정보 및 특수작전 연구소’라는 뜻의 헤브루어 약자다. 누구나 아는 기관을 ‘연구소’로 위장하려는 모양새부터 보안을 앞세우는 정보기관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중요한 것은 ‘특수작전’이라는 단어다. 암살, 납치, 파괴 등 비합법적인 ‘공작’을 의미한다. 이름대로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공작국이다. 국민안전과 국가안보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정보와 공작의 양날의 칼을 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관’이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피 냄새가 진동한다.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압송한 나치 전범 아돌르 아이히만의 재판 장면.
모사드란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작전이 1960년 ‘홀로코스트의 기획자’인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압송작전이다. 아이히만은 이른바 ‘최종해결’로 불리는 유대인 절멸 계획을 서류로 입안한 인물이다. 종전 뒤 남미로 도주해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초기 모사드는 해외 거주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것과 함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을 추적해 응징하는 일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 모사드 2대 국장 하렐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 20일간 머물며 아이히만 확인과 압송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962년 처형됐다.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은 세상 끝까지 추적해 응징한다’는 게 모사드의 공작 원칙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공동체의 의지이기도 하다. 모사드의 모든 활동은 국민과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모사드의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 전쟁 하나를 승리로 이끌 정도로 유용한 정보를 모사드에 전달했다. 그는 1965년 발각돼 처형됐지만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그의 정보를 바탕으로 난공불락이던 시리아 골란고원을 10시간 만에 점령했다. 조종사들은 레이더망을 우회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탁월한 정보수집 능력으로 이름 높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전설의 스파이’로 불리는 엘리 코헨을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킨 것이다. 시리아 알레포 출신의 시오니스트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이스라엘로 옮긴 뒤 군정보기관을 거쳐 모사드 요원이 됐다.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그는 현지 아랍인 사회에서 시리아 출신 인사들과 사귀었다. 카멜 아민 타베트라는 가명으로 시리아에 침투한 그는 정치권과 군부 고위층과 사귀면서 정보를 입수했다. 자신이 시리아 고위층과 방문한 군 기지 위치와 현지에서 목격한 무기체계도 상세하게 복기해 본국에 보고했다. 그 결과 모사드는 시리아가 소련과 함께 마련한 이스라엘 침공계획, 무기체계 배치 현황, 레이더 배치 상황과 근무자들의 습관, 이스라엘과 접경한 골란고원 군 배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1967년 ‘6일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골란고원을 단 10시간 안에 점령하고 전투기가 레이더를 피해 공격에 나설 있었던 것은 그의 정보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코헨은 1965년 1월 그의 아파트에서 무선 전파가 발신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시리아 당국에 체포돼 그해 5월 다마스쿠스의 마제 광장에서 공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트럭, 물자를 시리아에 다량 제공해 코헨과 맞바꾸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시리아 군 고위 장교들이 여군들을 불러 ‘부적절한 파티’를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소용없었다. 코헨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적국 시리아에 괴멸적인 타격을 안기고 사라졌다.
엘리 코헨은 1965년 1월 아파트에서 발신되는 전파를 수상하게 여긴 시리아 당국에 체퍼돼 그해 5월 다마스쿠스의 광장에서 공개 처형됐다. 그의 이름은 스파이의 전설로 남았다. [중앙포토]
엘리 코헨은 모사드의 자랑이자 슬픔이다.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유해를 조국의 땅에 귀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이 특수작전을 벌여 그의 유해를 가져갈까봐 매장 장소를 세 차례나 옮겼다. 무덤 위치 찾기와 유해 귀환 프로젝트는 지금도 추진 중이다. 모사드의 슬픔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예루살렘 헤르지산에 있는 국립묘지의 ‘무명용사의 정원’에 그를 기리는 석판을 대신 세웠다. 정보기관원은 물론 국민의 가슴을 적시는 장소다. 1977년 열린 엘리 코헨의 아들 샤이의 유대 성인식에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부터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이 함께했다. 이츠하크 호피 당시 모사드 국장도 이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루살렘 헤르지 산의 국립묘지에 설치된 엘리 코헨 추모 석판. 시리아에서 그의 유해를 찾아 환국시키는 작전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엘리 코헨으로 상징되는 정보 수집 능력을 그 뒤로도 유지했다. 2011년 9.11테러와 관련한 결정적인 정보도 제공했다. 미국 정보당국이 그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뿐이다. 심지어 김정남과 그 가족이 2001년 5월 남미국가의 위조여권을 들고 일본에 입국하려다 제지된 것도 모사드가 제공한 정보 덕분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 당국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항에서 그를 제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이 정보의 원천은 모사드가 수집한 것으로 뒤늦게 전해졌다. 모사드 요원도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한계를 넘어서는 정보 수집 능력을 보여왔다.
김정남의 일본 입국시도가 좌절된 것은 당시 모사드가 입수한 정보를 미국 중앙정보국(CIA)를 통해 일본에 전달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피비린내 나는 공작으로도 이름 높다. 특히 ‘현대 역사상 가장 끈질긴 보복’으로 평가 받는 ‘신의 분노’ 작전은 감탄과 비난을 동시에 자아낸다. 발단은 팔레스타인 측의 테러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 참가했던 이스라엘 체조선수 11명이 숙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에 인질로 잡혔다가 결국 전원 살해됐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 참가하러 떠났던 청년들이 시신으로 돌아오자 모사드는 ‘신의 분노’라는 이름의 보복작전에 착수했다. 이 테러에 개입한 검은 9월단 대원들을 9년 간에 걸쳐 집요하게 추적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들을 응징했다. 프랑스 파리, 레바논 베이루트, 그리스 아테네 등지에서 보복 암살작전을 수행했다. 전화기에 부비트랩을, 침대 밑에 폭약을 설치하는 방식도 사용됐다. 자동차 폭탄과 포인트 블랭크(근접 사살) 등은 암살의 고전이 됐다. 피비린내 나는 작전은 영화 ‘뮌헨’에서 잘 묘사됐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체조선수단을 억류하가 학살한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 대원의 모습. [중앙포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부로 검은 9월단 지도자로 뮌헨 학살을 이끌었던 알리 하산 살라메를 제거한 1979년 1월 베이루트 작전 때는 모사드 요원들이 장기 침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살라메는 자동차 폭탄으로 경호원들과 함께 폭사했다. 사건 직후 인근 마을에 살던 주민 여러 명이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완벽한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모두 현지에 침투한 모사드 요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압권은 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2층 베란다에서 고양이를 안고 동네 도로를 내려다보던 할머니도 고양이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노인 모사드 요원이었던 것이다. 노인으로 분장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할머니는 4년 전 영국 여권을 들고 구호단체 요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베이루트에 입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에는 그런 할머니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경호원들과 함께 자동차로 이동하던 살라메는 이 할머니가 내려다보던 도로에 정차한 자동차에서 터진 폭탄으로 사망했다. 한 장소에 4년간 머물며 살라메가 나타나기를 4년을 기다린 셈이다. 소름이 끼치는 장기 작전이다.
검은9월단의 뮌헨 학살을 기획한 알리 하산 살라메. 1979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자동차 폭탄이 터지면서 숨졌다. 모사드가 아니면 구가 그 작전을 펼쳤을까. [중앙포토]
1981년 8월 PLO의 간부로 검은 9월단 간부 아부 다우드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암살된 것이 ‘신의 보복’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부 다우드는 근접 거리에서 여러 발의 권총을 맞고 사망했다. 사건 직후 즉각 모사드가 거론됐지만 아무리 수사해도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중동과 유럽 지역에서 아랍권 인사의 암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사드는 배후로 거론되거나 지목됐다. 증거는 하나도 없는 데 말이다. 그런 작전을 수행할 의지와 능력을 지닌 조직이 드물다는 점에서 모사드를 지목하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긴 하다.
뮌헨 학살 당시 검은 9월단의 수류탄으로 파괴된 독일 헬기. [중앙포토]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아랍권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파괴 무기체계 제조자들도 찾아서 제거해왔다. 적국의 무기개발을 돕는 경우 아랍인이고 서구인이고 가리지 않고 제거해왔다. 1960년대 중동 국가들의 로켓 개발을 돕던 전 나치 과학자들을 제거하는 ‘다모클레스’ 작전은 정보공작 세계에서 전설로 통한다. 알려진 것으론 1962년 9월11일 독일 뮌헨에서 이집트의 미사일 개발을 돕던 서독 국적의 로켓 과학자 하인츠 크루크가 사무실에서 사라진 것이 이와 관련한 모사드의 첫 작전으로 짐작된다. 크루크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1962년 11월28일 이집트 할루안의 비밀 로켓공장인 팩토리333에서 우편물 폭탄이 터져 로켓 기술자 5명이 숨지고 프로젝트 책임자가 시력을 잃었다. 우편물에는 독일 함부르크 소인이 찍혀 있었다는 사실 외에 범인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폐막식에 걸린 올림픽 조기. 뮌헨학살은 올림픽의 상처로 남았다. [중앙포토]
1990년 3월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캐나다 출신의 야포 개발자인 제럴드 벌이 살고 있던 아파트 문 앞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포인트 블랭크 방식이다. 벌은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던 사담 후세인의 주문을 받고 사거리 750km의 초대형 대포를 개발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스커드 미사일 개량 프로젝트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이라크의 숙적인 이란과 함께 이스라엘을 겨냥한 무기체계 개발로 볼 수 있다.
911테러 당시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두번 째 여객기가 돌진하는 장면. 당시 모사드는 테러 관련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미국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정보실패'로 이어졌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1960~70년대 툭 하면 서방 여객기를 납치해 유대인을 포함한 승객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한 무장단체 간부들도 주요 살해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도 자동차 폭탄, 전화 폭탄, 휴대전화, 포인트 블랭크(처형방식의 근접 사살) 등 다양한 수법이 동원됐다. 모사드는 암살공작의 살아있는 교과서를 온몸으로 써왔다. 이런 공작 방식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안전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적을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앙일보] 입력 2017.12.02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