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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 이야기 - 이스라엘 정보기관

해암도 2017. 12. 3. 06:34

모사드 국장 평균 5년6개월 재임 … 정권 관계없이 자리 지켰다

‘침묵의 구원자’ 이스라엘 정보기관 수장  
 
국가정보원이 숨 돌릴 틈 없이 펀치를 맞고 있다. 예산 삭감에 조직과 역할 축소, 명칭 변경까지 요구받는다. 전직 원장들이 줄줄이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여당은 국정원이 이전 정권에서 정치 개입에 나섰다고 비난한다. 반면 야당은 정보기관 본연의 정보 능력 저하와 활동 침체를 우려한다. 서로 할 말이 많다.
 

국민이 정권보다 더 믿고 지지
접근 힘든 각국 은밀한 정보 보유
미·러 등 강대국도 함부로 못해

어떠한 도덕보다 안보·국익 우선
철저한 정치 중립, 해외 작전만 수행
국제적 비난 땐 국가 차원 적극 방어

대부분 군에서 전공 쌓은 ‘무골’
실로아흐 초대 국장 독립전쟁 영웅
3대 아미트 ‘6일전쟁’ 승리 기여
5대 호피는 엔테베 작전 주도


이런 상황에서 바람직한 정보기관과 그 수장의 자격·업무, 자세를 해외 사례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정보기관은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벤치마킹 대상이다. 모사드는 대부분의 국가 정보기관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국민과 국가를 위해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피 냄새를 마다치 않고 은밀하고 살벌한 정보와 공작의 세계를 지켜온 모사드 국장은 정권 교체와 별 상관없이 임무를 수행해 왔다. 국가의 사활이 걸린 정보 수집과 정세 판단으로 국가 안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선출된 권력인 정치권조차 모사드를 비롯한 정보기관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한정된 기간 권력을 위임받은 정권보다 국가와 운명을 함께하는 정보기관을 국민이 더 믿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요원들 덕분에 서방의 접근이 극히 어려운 이란·시리아 등에 침투해 얻은 고급 정보를 풍부하게 보유해 국제적으로도 경외의 대상이다. 미국이나 러시아가 이스라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대 모사드 국장

역대 모사드 국장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해외 정보공작기관이다. 국경 밖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모든 정보 수집과 암살·납치, 역정보 흘리기 등 공작활동을 담당한다. 국내 보안국인 신베트, 군정보국인 아만과 함께 국가 정보라는 ‘음지’를 책임진다. 국내와 점령지인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골란고원에서 벌이는 모든 임무는 신베트의 관할이다. 군은 별도로 활동한다.
 
모사드는 1947년부터 활동해 왔지만 공식 창설은 49년이다. 이후 68년간 12명의 국장이 정보와 공작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관’을 이끌어 왔다. 국민 안전과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은 뭐든지 수행하고 절대 입을 열지 않아 ‘침묵의 구원자’로 통한다.
 
이스라엘에선 좌우할 것 없이 모든 정권이 모사드 국장 자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해 왔다. 모사드가 해외에서 벌인 ‘잔혹하고 비도덕적인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비난받거나 국제법적 사법처리 가능성이 생기면 오히려 정치권이 나서 방어하고 보호해 왔다. 어떠한 도덕이나 국제법도 국민의 안위나 국익보다 위에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8년간 12명의 국장 중 2년간 재임한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4~10년씩 자리를 지켰다. 평균 5년6개월 재임했다. 모사드 국장은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용기, 정보·작전 능력과 경험, 그리고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사지에 뛰어들게 만드는 리더십이 충만한 인물이 맡아 왔다. 49년 취임한 초대 레우벤 실로아흐 국장부터 89년 물러난 6대 나훔 아드모니 국장까지는 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참전용사다. ‘이스라엘-아랍전쟁’ ‘제1차 중동전쟁’으로도 불리는 전쟁이다. 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분쇄하려고 인근 이집트·시리아·요르단·레바논은 물론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수단·예멘 등 이슬람권 대부분이 공격에 나섰다. 신생국 이스라엘의 국민은 자국을 포위한 아랍·이슬람권 국가들과 온몸으로 맞서며 독립을 지켜냈다.
 
이뿐만 아니다. 모사드 수장 대부분은 군에서 상당한 전공을 쌓은 ‘무골’이다. 역대 국장 12명 중 4명이 군 고위 장성 출신이다. 6대 아드모니 국장은 군 정보기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모사드 부국장을 거쳐 국장을 맡았다. 5대 이츠하크 호피 국장은 73년 소련제 최신 무기를 갖추고 기습한 아랍권에 밀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욤키푸르 전쟁’ 당시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전세 역전에 기여한 전쟁영웅이다. 전쟁 직후 국장을 맡아 조직과 임무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모사드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정보 당국이 연이은 승리에 취해 아랍권을 얕잡아 보는 바람에 기습 징후를 조기 경보하지 못한 ‘정보 실패’로 이어졌다는 처절한 반성 때문이었다. 정보 실패로 군이 적군에 유린당하고 장병이 희생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목격한 호피가 국장을 맡음으로써 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었다는 평가다.
 
역대 모사드 국장은 성과로 말한다. 대부분 재임 중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초대 실로아흐 국장은 모사드가 창설되기도 전인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아랍권의 침공계획을 입수해 다비드 벤구리온 초대 총리에게 전달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벤구리온은 모사드 창설을 결심했다. 2대 이세르 하렐 국장은 모사드란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기획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60년 도피지인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

역대 이스라엘 총리

3대 메이르 아미트는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을 시리아의 고위층 깊숙이 침투시켜 ‘6일전쟁’ 당시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손금 보듯 하며 정보전과 전쟁에서 완승하는 데 기여했다. 4대 즈비 자미르는 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의 무장조직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학살한 데 대한 보복인 ‘신의 분노’ 작전을 기획했다. 영화 ‘뮌헨’으로 유명한 이 작전은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의지와 집념, 모사드의 작전 능력을 잘 보여줬다.
 
5대 호피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에 납치돼 우간다에 기착해 있던 여객기 승객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을 주도했다. 이라크가 핵시설을 가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군이 이를 폭격해 파괴한 ‘오페라 작전’에도 기여했다. 이라크 폭격이라는 정치적 결단읕 정치권이 내렸지만 이를 차질 없이 하기 위한 정확한 정보 수집과 작전 지원은 모사드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 뮌헨 학살 기획자로 ‘검은 9월단의 황태자’로 알려진 알리 하산 살라메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제거한 작전도 기획했다. 모사드는 이 모든 작전 개입을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으로 대응할 뿐이다. 모든 작전은 비밀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모사드가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내부의 의지와 정치권의 정보기관 명예 존중, 그리고 국민의 지지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권은 물론 ‘신의 분노’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국가 안보가 위태로운 것뿐이었다.
 
[S BOX] 이스라엘판 델타포스 ‘사예렛 메트칼’ 출신 국장 3명
역대 모사드 국장들의 경력 중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군 엘리트 특수부대인 ‘사예렛 메트칼’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7대 샤브타이 샤비트, 8대 다니 야톰, 10대 메이르 다간, 11대 타미르 파르도가 이 부대 출신이다. 사예렛 메트칼은 한마디로 목숨을 내놓고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전 부대다. 별명이 ‘이스라엘판 델타포스’로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해 수색정찰을 수행한다. 전선의 현장 정보를 입수하고 국경 너머에서 인질을 구출하거나 요인을 저격하는 임무를 맡는다. 목숨이 오가는 ‘불가능한 작전(Mission Impossible)’을 숱하게 성공시켜 조국을 더욱 안전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작전 내용은 일절 비밀에 부친다는 점에서 모사드와 성격이 통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엔테베 작전의 영웅으로 현장에서 전사한 요나단 네타냐후 형제,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 등도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 파르도 국장은 군 복무 시절 엔테베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모사드 국장 중에는 군 장성 출신도 4명에 이른다. 군 장성 출신이 아닌 모사드 국장은 모두 현장요원 출신이다. 행정공무원 출신이나 특정 정당 지지자나 조력자가 정치권과 코드가 통한다고 해서 이 자리를 맡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7.12.02


모사드, 국가안보를 위협한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모사드 <중> 집념의 공작활동

모사드 집념의 작전으로 위협 제거
유대인을 해친 자는 용서하지 않아
72년 뮌헨올림픽 선수단 학살되자
9년간 ‘신의 복수’ 작전 벌여 보복
전화폭탄, 침대폭탄, 근거리 저격
선혈낭자 특수공작의 교과서 완성
시리아 고위층 침투해 정보수집
6일전쟁 골란고원 10시간에 점령
스파이 엘리 코헨은 전쟁 전 처형
유해 환국 작전 지금도 계속 진행

   

모사드는 ‘정보 및 특수작전 연구소’라는 뜻의 헤브루어 약자다. 누구나 아는 기관을 ‘연구소’로 위장하려는 모양새부터 보안을 앞세우는 정보기관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중요한 것은 ‘특수작전’이라는 단어다. 암살, 납치, 파괴 등 비합법적인 ‘공작’을 의미한다. 이름대로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공작국이다. 국민안전과 국가안보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정보와 공작의 양날의 칼을 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관’이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피 냄새가 진동한다.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압송한 나치 전범 아돌르 아이히만의 재판 장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압송한 나치 전범 아돌르 아이히만의 재판 장면.

 
모사드란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작전이 1960년 ‘홀로코스트의 기획자’인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압송작전이다. 아이히만은 이른바 ‘최종해결’로 불리는 유대인 절멸 계획을 서류로 입안한 인물이다. 종전 뒤 남미로 도주해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초기 모사드는 해외 거주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것과 함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을 추적해 응징하는 일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 모사드 2대 국장 하렐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 20일간 머물며 아이히만 확인과 압송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962년 처형됐다.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은 세상 끝까지 추적해 응징한다’는 게 모사드의 공작 원칙으로 알려졌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공동체의 의지이기도 하다. 모사드의 모든 활동은 국민과 유대인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모사드의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 전쟁 하나를 승리로 이끌 정도로 유용한 정보를 모사드에 전달했다. 그는 1965년 발각돼 처형됐지만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그의 정보를 바탕으로 난공불락이던 시리아 골란고원을 10시간 만에 점령했다. 조종사들은 레이더망을 우회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중앙포토]

모사드의 '전설의 스파이' 엘리 코헨. 전쟁 하나를 승리로 이끌 정도로 유용한 정보를 모사드에 전달했다. 그는 1965년 발각돼 처형됐지만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그의 정보를 바탕으로 난공불락이던 시리아 골란고원을 10시간 만에 점령했다. 조종사들은 레이더망을 우회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탁월한 정보수집 능력으로 이름 높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전설의 스파이’로 불리는 엘리 코헨을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킨 것이다. 시리아 알레포 출신의 시오니스트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이스라엘로 옮긴 뒤 군정보기관을 거쳐 모사드 요원이 됐다.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그는 현지 아랍인 사회에서 시리아 출신 인사들과 사귀었다. 카멜 아민 타베트라는 가명으로 시리아에 침투한 그는 정치권과 군부 고위층과 사귀면서 정보를 입수했다. 자신이 시리아 고위층과 방문한 군 기지 위치와 현지에서 목격한 무기체계도 상세하게 복기해 본국에 보고했다. 그 결과 모사드는 시리아가 소련과 함께 마련한 이스라엘 침공계획, 무기체계 배치 현황, 레이더 배치 상황과 근무자들의 습관, 이스라엘과 접경한 골란고원 군 배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1967년 ‘6일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골란고원을 단 10시간 안에 점령하고 전투기가 레이더를 피해 공격에 나설 있었던 것은 그의 정보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코헨은 1965년 1월 그의 아파트에서 무선 전파가 발신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시리아 당국에 체포돼 그해 5월 다마스쿠스의 마제 광장에서 공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트럭, 물자를 시리아에 다량 제공해 코헨과 맞바꾸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시리아 군 고위 장교들이 여군들을 불러 ‘부적절한 파티’를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소용없었다. 코헨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적국 시리아에 괴멸적인 타격을 안기고 사라졌다.  
엘리 코헨은 1965년 1월 아파트에서 발신되는 전파를 수상하게 여긴 시리아 당국에 체퍼돼 그해 5월 다마스쿠스의 광장에서 공개 처형됐다. 그의 이름은 스파이의 전설로 남았다. [중앙포토]

엘리 코헨은 1965년 1월 아파트에서 발신되는 전파를 수상하게 여긴 시리아 당국에 체퍼돼 그해 5월 다마스쿠스의 광장에서 공개 처형됐다. 그의 이름은 스파이의 전설로 남았다. [중앙포토]

 
엘리 코헨은 모사드의 자랑이자 슬픔이다. 그를 구하지 못한 것은 물론 유해를 조국의 땅에 귀환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이 특수작전을 벌여 그의 유해를 가져갈까봐 매장 장소를 세 차례나 옮겼다. 무덤 위치 찾기와 유해 귀환 프로젝트는 지금도 추진 중이다. 모사드의 슬픔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예루살렘 헤르지산에 있는 국립묘지의 ‘무명용사의 정원’에 그를 기리는 석판을 대신 세웠다. 정보기관원은 물론 국민의 가슴을 적시는 장소다. 1977년 열린 엘리 코헨의 아들 샤이의 유대 성인식에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부터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이 함께했다. 이츠하크 호피 당시 모사드 국장도 이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루살렘 헤르지 산의 국립묘지에 설치된 엘리 코헨 추모 석판. 시리아에서 그의 유해를 찾아 환국시키는 작전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중앙포토]

예루살렘 헤르지 산의 국립묘지에 설치된 엘리 코헨 추모 석판. 시리아에서 그의 유해를 찾아 환국시키는 작전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엘리 코헨으로 상징되는 정보 수집 능력을 그 뒤로도 유지했다. 2011년 9.11테러와 관련한 결정적인 정보도 제공했다. 미국 정보당국이 그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뿐이다. 심지어 김정남과 그 가족이 2001년 5월 남미국가의 위조여권을 들고 일본에 입국하려다 제지된 것도 모사드가 제공한 정보 덕분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 당국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항에서 그를 제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이 정보의 원천은 모사드가 수집한 것으로 뒤늦게 전해졌다. 모사드 요원도 인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한계를 넘어서는 정보 수집 능력을 보여왔다.  
김정남의 일본 입국시도가 좌절된 것은 당시 모사드가 입수한 정보를 미국 중앙정보국(CIA)를 통해 일본에 전달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중앙포토]

김정남의 일본 입국시도가 좌절된 것은 당시 모사드가 입수한 정보를 미국 중앙정보국(CIA)를 통해 일본에 전달한 때문으로 알려졌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피비린내 나는 공작으로도 이름 높다. 특히 ‘현대 역사상 가장 끈질긴 보복’으로 평가 받는 ‘신의 분노’ 작전은 감탄과 비난을 동시에 자아낸다. 발단은 팔레스타인 측의 테러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 참가했던 이스라엘 체조선수 11명이 숙소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에 인질로 잡혔다가 결국 전원 살해됐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 참가하러 떠났던 청년들이 시신으로 돌아오자 모사드는 ‘신의 분노’라는 이름의 보복작전에 착수했다. 이 테러에 개입한 검은 9월단 대원들을 9년 간에 걸쳐 집요하게 추적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들을 응징했다. 프랑스 파리, 레바논 베이루트, 그리스 아테네 등지에서 보복 암살작전을 수행했다. 전화기에 부비트랩을, 침대 밑에 폭약을 설치하는 방식도 사용됐다. 자동차 폭탄과 포인트 블랭크(근접 사살) 등은 암살의 고전이 됐다. 피비린내 나는 작전은 영화 ‘뮌헨’에서 잘 묘사됐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체조선수단을 억류하가 학살한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 대원의 모습. [중앙포토]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체조선수단을 억류하가 학살한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 대원의 모습. [중앙포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부로 검은 9월단 지도자로 뮌헨 학살을 이끌었던 알리 하산 살라메를 제거한 1979년 1월 베이루트 작전 때는 모사드 요원들이 장기 침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살라메는 자동차 폭탄으로 경호원들과 함께 폭사했다. 사건 직후 인근 마을에 살던 주민 여러 명이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완벽한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모두 현지에 침투한 모사드 요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압권은 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2층 베란다에서 고양이를 안고 동네 도로를 내려다보던 할머니도 고양이와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노인 모사드 요원이었던 것이다. 노인으로 분장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할머니는 4년 전 영국 여권을 들고 구호단체 요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베이루트에 입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에는 그런 할머니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경호원들과 함께 자동차로 이동하던 살라메는 이 할머니가 내려다보던 도로에 정차한 자동차에서 터진 폭탄으로 사망했다. 한 장소에 4년간 머물며 살라메가 나타나기를 4년을 기다린 셈이다. 소름이 끼치는 장기 작전이다.  
 
검은9월단의 뮌헨 학살을 기획한 알리 하산 살라메. 1979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자동차 폭탄이 터지면서 숨졌다. 모사드가 아니면 구가 그 작전을 펼쳤을까. [중앙포토]

검은9월단의 뮌헨 학살을 기획한 알리 하산 살라메. 1979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자동차 폭탄이 터지면서 숨졌다. 모사드가 아니면 구가 그 작전을 펼쳤을까. [중앙포토]

1981년 8월 PLO의 간부로 검은 9월단 간부 아부 다우드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암살된 것이 ‘신의 보복’ 작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부 다우드는 근접 거리에서 여러 발의 권총을 맞고 사망했다. 사건 직후 즉각 모사드가 거론됐지만 아무리 수사해도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중동과 유럽 지역에서 아랍권 인사의 암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사드는 배후로 거론되거나 지목됐다. 증거는 하나도 없는 데 말이다. 그런 작전을 수행할 의지와 능력을 지닌 조직이 드물다는 점에서 모사드를 지목하는 건 합리적인 의심이긴 하다.  
 
뮌헨 학살 당시 검은 9월단의 수류탄으로 파괴된 독일 헬기. [중앙포토]

뮌헨 학살 당시 검은 9월단의 수류탄으로 파괴된 독일 헬기. [중앙포토]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아랍권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파괴 무기체계 제조자들도 찾아서 제거해왔다. 적국의 무기개발을 돕는 경우 아랍인이고 서구인이고 가리지 않고 제거해왔다. 1960년대 중동 국가들의 로켓 개발을 돕던 전 나치 과학자들을 제거하는 ‘다모클레스’ 작전은 정보공작 세계에서 전설로 통한다. 알려진 것으론 1962년 9월11일 독일 뮌헨에서 이집트의 미사일 개발을 돕던 서독 국적의 로켓 과학자 하인츠 크루크가 사무실에서 사라진 것이 이와 관련한 모사드의 첫 작전으로 짐작된다. 크루크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1962년 11월28일 이집트 할루안의 비밀 로켓공장인 팩토리333에서 우편물 폭탄이 터져 로켓 기술자 5명이 숨지고 프로젝트 책임자가 시력을 잃었다. 우편물에는 독일 함부르크 소인이 찍혀 있었다는 사실 외에 범인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1972년 뮌헨올림픽 폐막식에 걸린 올림픽 조기. 뮌헨학살은 올림픽의 상처로 남았다. [중앙포토]

1972년 뮌헨올림픽 폐막식에 걸린 올림픽 조기. 뮌헨학살은 올림픽의 상처로 남았다. [중앙포토]

1990년 3월2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캐나다 출신의 야포 개발자인 제럴드 벌이 살고 있던 아파트 문 앞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포인트 블랭크 방식이다. 벌은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던 사담 후세인의 주문을 받고 사거리 750km의 초대형 대포를 개발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스커드 미사일 개량 프로젝트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이라크의 숙적인 이란과 함께 이스라엘을 겨냥한 무기체계 개발로 볼 수 있다.  
911테러 당시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두번 째 여객기가 돌진하는 장면. 당시 모사드는 테러 관련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미국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정보실패'로 이어졌다. [중앙포토]

911테러 당시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두번 째 여객기가 돌진하는 장면. 당시 모사드는 테러 관련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미국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정보실패'로 이어졌다. [중앙포토]

 
모사드는 1960~70년대 툭 하면 서방 여객기를 납치해 유대인을 포함한 승객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한 무장단체 간부들도 주요 살해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도 자동차 폭탄, 전화 폭탄, 휴대전화, 포인트 블랭크(처형방식의 근접 사살) 등 다양한 수법이 동원됐다. 모사드는 암살공작의 살아있는 교과서를 온몸으로 써왔다. 이런 공작 방식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안전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적을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앙일보] 입력 2017.12.02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사랑에 빠지거나 CCTV 포즈 '덜미'···모사드 치명적 실수들

 방심, 모사드의 치명적인 실수-그래도 요원에게 문책 대신 격려를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이스라엘 공작기관 모사드<하>
공작 과정에서 요원들 실수도
73년 노르웨이에서 오인 사살
철수과정에서 6명 전원 체포돼
신분까지 노출 공작요원 생명 끝
실수보다 험한 임무 수행 평가
요원 이름 딴 광장 건설 명예
국가안보 위해 일하는 요원 존중
인사도 개혁도 기관 내부에 맡겨

 
모사드도 실수한다. 작전 중 중대한 실수를 범해 국제적인 망신을 초래한 적도 여러 차례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사건이다. 릴레함메르는 1994년 겨울 올림픽이 열린 바로 그곳이다. 노르웨이 내륙에 있는 인구 2만7000명의 소도시로 아름다운 산과 계곡, 호수로 유명하며 스키 리조트가 자리 잡고 있다. 모사드가 이런 곳에서 공작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산간의 자그마한 도시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체조 선수들이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에게 학살됐다. 이스라엘은 '신의 보복'이라는 이름의 작전으로 관련자들의 응징에 나섰다. 그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사진은 희생된 선수들의 사진. 이스라엘인의 가슴을 후벼파는 사진이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체조 선수들이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검은 9월단'에게 학살됐다. 이스라엘은 '신의 보복'이라는 이름의 작전으로 관련자들의 응징에 나섰다. 그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사진은 희생된 선수들의 사진. 이스라엘인의 가슴을 후벼파는 사진이다.

 
<모로코인을 뮌헨 학살 기획자로 오인해 사살하는 실수>
모사드는 1973년 7월 21일 릴레함메르의 바에서 일하는 모로코인 웨이터 아메드 부키치를 ‘팔레스타인의 황태자’로 불렸던 알리 하산 살라메로 오인해 사살했다. 살라메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간부이자 검은 9월단의 지도자로 뮌헨 학살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릴레함메르 작전은 당시 이 학살과 관련한 검은 9월단 조직원을 찾아서 보복하는 ‘신의 분노’ 작전의 일부로 진행됐다. 당시 모사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전이었다. 실제로 살라메는 노르웨이에서 신분을 숨기고 숨어살고 있었지만, 모사드 요원들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인물을 오인 사살했다.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의 평화로운 모습. [사진=Brian Aslak/Flickr]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의 평화로운 모습. [사진=Brian Aslak/Flickr]

 
하지만 현장에 파견된 6명의 모사드 요원들은 실망스러운 행동을 연속적으로 벌였다. 부주의로 작전 당시 사용했던 자동차를 함께 타고 공항으로 향하다 모두 체포돼 망신을 당했다. 작전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물론 이동 수단까지 모두 버리는 것은 물론 조원들이 서로 뿔뿔이 흩어져 이동하는 것은 공작의 기본이다. 현지 경찰이나 보안 당국이 무선으로 차량의 종류와 색상, 번호판, 사람 숫자나 인상착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이동하는 사람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의 모습. [사진=Ulf Bodin/Flickr]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의 모습. [사진=Ulf Bodin/Flickr]

모사드 요원들은 현장에서 이런 기본적인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체포되는 망신을 당했다. 이들은 체포와 재판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돼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 해외근무가 영영 불가능해졌다. 가짜 캐나다 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돼 캐나다 정부의 항의까지 받았다.  
 
심지어 재판과정에서 여성 요원 실비아 라파엘이 자신을 담당하던 현지 변호사 안네우스 스키외드트와 사랑에 빠져 재판 뒤 결혼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두 사람은 1992년 라파엘의 출신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사랑은 개인의 자유지만 정보공장 요원이 이런 상황에서 벌일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분과 임무, 상황을 망각한 행동이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습이었다.
 
<작전에서 실수한 요원들에게 문책보다 격려>  
요원들은 그 뒤 모사드와 이스라엘 외교 당국의 노력으로 2년 안에 모두 풀려났다. 하지만 모사드는 이 사건으로 여러 군데의 안전가옥을 비롯한 유럽 내 비밀 작전 인프라의 문을 닫아야 했다. 모사드의 해외공작은 이 사건 이후 한동안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 북부 미그달에 있는 실비아 라파엘 광장. 릴리함메르 작전에 참가했던 실비아 라파엘의 이름을 땄다. 비록 실수는 있었지만 도덕적, 신체적 압박을 이겨내고 조국을 위해 임무를 수행했던 정보공작 요원에 대한 공동체의 존경심을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 북부 미그달에 있는 실비아 라파엘 광장. 릴리함메르 작전에 참가했던 실비아 라파엘의 이름을 땄다. 비록 실수는 있었지만 도덕적, 신체적 압박을 이겨내고 조국을 위해 임무를 수행했던 정보공작 요원에 대한 공동체의 존경심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귀환한 요원들은 내부에서 견책보다 격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수는 바로 잡아야 하지만 해외에서 임무를 험한 작전을 수행한 요원들에 대한 임무 수행 평가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보인다. 오히려 실비아 라파엘의 경우 2004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뒤 이스라엘 북부 갈리리 호수 변의 작은 마을 미그달에 그의 이름을 딴 ‘실비아 라파엘 광장’이 들어설 정도로 존경받고 있다. 사건이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 문제로 비화하지도 않았다. 뮌헨올림픽 당시 총리에 재임 중이었으며 ‘신의 분노’ 작전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골다 메이어 총리(1969년 3월~74년 6월 재임, 노동당)도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았다.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급 공작을 벌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게 마련이라는 인식이 바탕이다. 정보기관은 항상 완벽함을 도모해야 하겠지만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권의 국가안보와 정보기관에 대한 인식도 한몫 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임무도, 책임도, 뒤처리도, 요원 평가도, 판단도, 시스템 개혁도 정보당국이 내부에서 조용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모사드가 수행하는 임무는 특정 정파가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에 대한 존중은 곧 국민에 대한 존중이나 마찬가지다. 
하마스 지도자 할레드 마샬. 팔레스타인인에겐 존경 받는 정치지도자이자 애국자다. 하지만 이스라엘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다.

하마스 지도자 할레드 마샬. 팔레스타인인에겐 존경 받는 정치지도자이자 애국자다. 하지만 이스라엘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다.

 
 
<1997년 하마스 지도자 독살 실패, 미국 압력으로 해독제 제공 망신>
모사드는 1997년에도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9월 25일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하마스 정치 지도자인 할레드 마샬을 독살하려다 실패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캐나다 여권을 지닌 두 명의 모사드 요원이 요르단 당국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이스라엘은 빌 클린턴의 미국 대통령의 압력에 못 이겨 마샬을 살릴 해독제를 제공했다. 모사드 암살공작조가 자국 여권을 사용한 데 분노한 캐나다는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이스라엘은 외교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2010년 두바이 호텔에서 암살하고 나오다 CCTV에 포즈 지어 들통>  
모사드는 2010년 1월 19일 아랍에리미트(UAE) 두바이에서 상세한 공작 내용이 파악 당하는 망신을 당했다. 이날 한 호텔에서 공작을 벌이고 나오던 요원들의 얼굴이 CCTV에 찍혔다. 한 여성 요원은 CCTV를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는 정보 세계에서 명백한 실수다. 이들이 벌인 공작을 수사할 때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날 이 호텔에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고위 군사지휘관 마무드 알마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알마부는 해외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무기와 폭탄을 구입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으로 들여오는 일을 해왔다. 팔레스타인에는 애국자겠지만 이스라엘엔 안보를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위험인물이다.  
모사드 요원으로 추정되는 가짜 여권 소지자들이 2010년 알마부 살해 직후 공항에 도착한 모습. 두바이 경찰이 공개한 공항 CCTV의 모습이다.

모사드 요원으로 추정되는 가짜 여권 소지자들이 2010년 알마부 살해 직후 공항에 도착한 모습. 두바이 경찰이 공개한 공항 CCTV의 모습이다.

 
당시 호주·프랑스·영국·아일랜드·네덜란드 여권을 지닌 여러 명의 남녀가 객실에서 알마부를 전기쇼크로 일단 기절시킨 뒤 근육마비제인 숙시닐콜린을 투여해 깨어나도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하게 조치한 다음 베개로 얼굴을 덮어 질식시켜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잔혹하고 집요한 방식이다. 모사드의 암살 작전이 얼마나 지독하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이를 통해 모사드의 암살 수법 하나가 상세하게 공개됐다. 
 
이 남녀들은 알마부 살해 뒤 유유히 두바이를 빠져나갔다. 우르르 호텔을 나가는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혔으니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캐나다 여권을 들고 공항을 무사히 빠져나가긴 했지만, 얼굴이 노출됐으며 UAE 당국이 캐나다에 문의한 결과 이런 인물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하마터면 감전사고로 오인 처리될 뻔했던 알마부의 죽음은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모사드로 추정되는 조직의 암살 사건으로 결론 났다. 이들이 CCTV 등에 출입 흔적을 남기고 위조여권 사용이 들통 나는 바람에 이스라엘 정부가 곤욕을 치렀다. 이 요원들은 성형수술을 받기 전에는 해외 근무가 불가능해졌다.  
 
<해외에서 잡힌 요원 수단 가리지 않고 데려와>
하지만 이런 사건에서도 모사드가 철저히 지키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해외에서 잡힌 요원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떤 대가도 감수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아무리 모든 것이 들통나도 공식적으로는 절대 공작을 시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앞에서 소개한 수많은 작전 중 모사드가 했다고 시인한 작전은 하나도 없다. 모사드가 아니면 이를 수행할 조직이 없어도 그렇다. 모사드는 이렇게 입이 무거운 조직이다. 역대 모사드 국장도 마찬가지다.  
 
모사드는 작전을 증명할 아무런 자료도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조직이 경비 처리 영수증을 요구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다. 정부나 변호사들이 정보기관 요원이나 외부 협력자 이름을 공개하는 경우도 없다. 해외에서 체포된 요원이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공개해도 그게 진짜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저 그렇게 믿을 뿐이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아랍권에 밀리자 골란고원 전선에 나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 등 군 수뇌부을 독려하는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 재임 중 1972년 뮌헨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보복인 '신의 분노' 작전을 모사드에 지시했다. 그는 끝까지 모사드를 믿고 작전을 맡겼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외교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아랍권에 밀리자 골란고원 전선에 나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 등 군 수뇌부을 독려하는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 재임 중 1972년 뮌헨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보복인 '신의 분노' 작전을 모사드에 지시했다. 그는 끝까지 모사드를 믿고 작전을 맡겼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외교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공작 절대 시인 않고 활동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원칙> 
 
모사드는 이스라엘 정부가 외교에 필요한 거의 모든 해외 정보를 구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도 분명히 정보수집과 공작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비밀이다. 이를 존중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의 임무다.   
 
정보기관 수장이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정치에 눈을 돌릴 틈도 없다. 그러면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이유도 사라진다. 정보기관 수장은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 침묵으로 조직의 비밀과 명예를 지키면서 국익을 위해선 분명히 뭔가 하는 사람, 그런 인물이 정보기관의 수장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7.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