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 "IMF땐 급성, 지금은 만성질환" 경고 전문가 68% "외환위기 버금가는 위기가 5년 내에 올 수 있다"
한보, 기아의 연쇄 부도로 한국 경제 위기설(說)이 끊이지 않았던 1997년 11월 21일. 취임한 지 사흘밖에 안 된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밤 10시 20분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부는 금융·외환 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IMF 구제 금융 체제는 30대 재벌 중 16개 퇴출, 은행 26곳 가운데 16곳의 퇴출 등 한국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었지만, 미뤄왔던 각종 개혁 과제를 이행하게 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역할도 했다.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는 '위장된 축복(disguised blessing)'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경제는 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지대에 있는 걸까.
임 전 부총리는 지난 18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외환위기는 일시적 급성 질환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경제가) 서서히 죽어가는 암(癌)에 걸렸다"고 진단했다. 그는 "(주력 산업 중) 조선은 이미 중국에 (주도권을) 뺏겼고, 전자도 얼마 안 남았다"며 "주력 산업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3년 8개월 만에 IMF로부터 빌린 195억달러를 조기 상환했다. 임 전 부총리는 "IMF 체제 조기 졸업이 꼭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국민이 너무 빨리 고통과 교훈을 잊어버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기 졸업 때문에) 정부가 추진하던 규제 혁파와 노동 개혁이 제대로 안 됐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IMF 20주년을 맞아 한국경제연구원과 공동으로 일반 국민 800명과 경제 전문가 48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전문가 68%는 "외환 위기에 버금가는 위기가 향후 5년 내 발생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전문가들은 경제 위기 뇌관이 될 수 있는 취약한 분야로 '주력 산업의 몰락'(20.6%)과 '가계 부채'(17.5%), '낮은 노동생산성 및 노사 관계'(16.5%) 등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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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20년 전 실업자가 170만명을 넘는 상황에서도 국난(國難)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선 이런 공동체 의식이 많이 약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위기가 터질 경우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처럼 고통 분담에 동참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응답이 37.8%로 '그렇다'(29.2%)보다 많았다.
노동자 삶의 질 높이는 건 맞는데 임금 수준이 생산성 넘어버리면 기업들 아예 해외로 떠날 것 투자하면 인센티브 줘야할 판에 법인세 올리겠다고 겁이나 주고… 靑, 경제문제 너무 나서면 안돼… 장관들 사약받을 각오로 일해야 복지 잘해도 안보불안땐 소용없어
20년 전, 파산 위기에 몰린 한국 정부를 대표해서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임창열 전 부총리(현 킨텍스 대표)는 요즘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구제금융 협상 과정과 IMF 체제에서 경험했던 국제 사회의 냉대와 경제 주권 상실 상태를 한국 경제가 또다시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임 전 부총리는 "국제사회에서 약자(弱者)가 되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이 뜯기고 피를 빨린다"며 "다시는 약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외환위기 고통,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임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 초기 진화(鎭火)를 맡았던 인물이다. 국가 부도 위기이던 1997년 11월 통상산업부장관에서 부총리로 발탁돼 다음 해인 1998년 3월까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IMF 구제금융 195억달러를 2001년 8월에 다 갚고 조기 졸업할 수 있도록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임 전 부총리는 그러나 "IMF를 조기 졸업한 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교훈을 제대로 이해 못 하고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추진됐던 각종 정책이 '미완의 개혁'에 그치면서 아직까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임 전 부총리는 지적했다. 그는 "(관료와 노동조합의 저항으로) 규제 혁파와 노동 개혁이 제대로 안 된 게 가장 아쉽다"고 했다. 지난 14일 IMF는 우리 정부와 연례협의에서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성을 다시 언급했다. 임 전 부총리는 노동 개혁과 관련 "지금이라도 정부가 노동계와 대화를 해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노동자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는 건 맞지만, 노동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을 요구하면 경제가 못 견디고 기업들은 해외로 가버린다"면서 "정규직으로 채용했다가 회사가 어려워지면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경기가 좋아지면 해고됐던 사람들부터 다시 채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한국 경제,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임 전 부총리는 현재의 한국 경제에 대해 "외환위기는 일시적 급성질환이지만, 지금은 서서히 죽어가는 암에 걸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임 전 부총리는 특히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경쟁력 상실을 가장 우려했다. 그는 "중국이 정말 무섭다"고 했다. 조선은 이미 중국에 빼앗겼고, 자동차는 중국이 턱밑까지 쫓아왔다는 것이다. 전자도 얼마 안 남았고, 반도체도 중국이 엄청나게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임 전 부총리는 "우리 주력 산업의 생명을 어떻게 연장할 수 있을 것인지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의 투자를 유인하려면 세금 감면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줘도 시원치 않은데, 우리는 법인세 올린다고 겁이나 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부총리는 안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복지를 아무리 잘해도 안보가 불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안보 관련 불확실성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경제 장관들, 사약 받을 각오로 일해야"
임 전 부총리는 20년 전 외환위기 원인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은 경제 정책의 실패"라고 단언했다. 대기업은 차입(借入) 경영으로 몸집 불리기에 급급했고, 은행들은 대기업 상대 돈놀이에 빠져 있던 상황을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임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경제 문제에 청와대가 너무 나서면 안 된다"고 했다. 외환위기 직전 경제부처 의견과 달리 청와대가 환율 방어를 지시하면서 문제를 키웠던 일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에 정책실장·일자리수석·경제수석·사회수석·경제보좌관 등 "'다섯 시어머니'가 생겼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을
걱정하는 듯, 그는 "경제는 부총리 중심으로 가도록 놔두고, 장관들에게 인사권을 넘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전 부총리는 후배 경제 관료들을 향해서는 "대통령이 싫어하더라도,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조선 시대처럼 왕이 사약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장관이 되면 나라를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