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케네스 로고프 美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고액권만 없애도 탈세 10~15% 수준으로 줄고… 稅收는 늘고…
그래야 마이너스 금리정책도 효과
- ▲ 케네스 로고프 교수. /이진한 기자
30대 직장인 A씨 지갑은 10년 전과 비교해 몰라보게 가벼워졌다. 손바닥만 한 지갑 속 현금은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전부다. 동전은 아예 없다. 출퇴근 지하철, 식사, 쇼핑 모두 신용카드나 모바일 카드로 계산한다. 지난 1년간 5만원 이상 현금을 사용한 것은 결혼식과 상가(喪家)에 갔을 때가 전부다. 이마저도 모바일 메신저로 송금하는 일이 늘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8~9월 전국 성인 남녀 2500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용카드가 가장 이용 빈도 높은 지급 수단으로 드러났다. 신용카드 이용 비중은 2014년 31.4%에서 2015년 39.7%로 늘어난 반면, 현금 비중은 같은 기간 38.9%에서 36.0%로 낮아졌다.
그렇다면 현금 없는 사회는 이상적인가. 케네스 로고프(Rogoff·63)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8월 말 출간한 저서 '화폐의 종말(원제 The Curse of Cash)'에서 화폐를 폐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이득을 준다고 주장했다. 현금이 없어지면 탈세와 마약 거래, 부정부패 등 범죄를 줄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정부가 세수 증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로고프 교수는 위클리비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화폐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돈세탁, 뇌물 공여 및 수수, 마약 거래, 밀수 등 범죄 활동을 줄일 수 있다. 둘째 화폐를 폐지하는 것만으로 탈세가 크게 감소하기 때문에 정부 세수가 늘어난다. 셋째 최근 경제 불황으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는 나라가 늘어나는데, 화폐 폐지는 정부가 자유로운 금리 정책을 펼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뉴욕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로고프 교수는 미국 MIT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위스콘신주립대, UC버클리, 프린스턴대를 거쳐 현재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액권 폐지하면 범죄·탈세 감소할 것"
- ▲ /Getty Images 이매진스
"인정한다. 다소 이른 주제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책을 집필하게 됐다. 지금 당장 화폐를 모조리 없애자는 건 아니지만, 고액권 화폐부터 순차 폐지할 경우 어떤 긍정적 효과를 누릴 수 있는지 연구했다."
―화폐를 굳이 폐지하지 않아도 이용 빈도가 많이 줄어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흔히 '나는 요새 현금을 거의 안 쓴다. 따라서 현금 수요가 줄었을 것이다'란 얘기를 한다. 심지어 신용카드와 스마트폰 지급 결제 때문에 현금이 이미 매장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착각이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선진국에서 종이 화폐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 현금 중 1조3400억달러(약 1530조원)는 은행권 외부에 있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미국의 모든 사람이 최소한 현금 4200달러(약 480만원)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려스러운 점은 시중에 풀린 현찰 중 80%가 고액권인 100달러(약 11만원)짜리라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큰 현찰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유럽은 미국보다 큰 화폐 단위인 500유로(약 62만원), 1000스위스프랑(약 115만원)이 은행 밖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고액권은 누가 가지고 있나.
"아무도 모른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일상적으로 고액권 수십억달러를 현금으로 찍어내면서도, 그 돈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최근 FRB는 범죄에 연루된 돈세탁을 역추적하기 시작했는데, 고액권은 주로 지하경제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에서도 고액권은 범죄와 지하경제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국내 5만원권 발행 잔액은 9월말 현재 73조6615억원으로 전체 화폐 발행 잔액의 77%에 달하지만, 누적 환수율은 43.5%로 1만원짜리, 1000원짜리 지폐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고액권이 없어지면 범죄도 줄어들 거라고 보나.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마약 거래 등 범죄 장면에서는 돌돌 말린 두둑한 100달러짜리 지폐가 등장한다. 수백만달러도 100달러 지폐로는 서류 가방 하나에 불과하다. 아울러 많은 미국 자영업자는 외국인 노동자의 급여를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현금으로 값싸게 부리고 있는데, 지폐 폐지는 이런 불법 이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고액권이 없다고 범죄 행위 자체를 막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범죄에 쓰이는 현금 유통을 어렵게 만들 수는 있다. 아울러 고액권의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해선 다이아몬드, 금 등 다른 거래 수단의 출현을 엄격하게 감시해야 한다."
―화폐 폐지는 탈세를 막는 효과도 있다고 주장했다.
"단순하게 고액권 화폐만 없애도 탈세가 지금의 10~15%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본다. 누구나 세금을 좋아하지 않지만, 정부가 조세 회피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의 부담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화폐 있으면 마이너스 금리 정책 효과 보기 어려워"
- ▲ 케네스 로고프 교수의 저서 표지.
로고프 교수는 거시 경제 차원에서도 지폐 폐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각국이 펼치고 있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의 최대 걸림돌이 현금이라고 지적했다. 지폐는 일종의 '제로(0) 금리의 무기명 소지자 채권'이기 때문에 정부의 단기 채권을 대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먹히지 않는 것이 현금 때문이라고 했다.
"화폐가 존재하는 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효과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종이 화폐는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제로 금리 채권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금은 무기명성을 지녔고 과거의 기록도 알 수 없으며 소유자와 관계없이 유효한, 제로 금리의 무기명 채권이다. 겉으로는 사소한 문제로 보이지만, 지폐의 이런 특성으로 인해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8년간 일부 국가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불가피하게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현금 없는 사회가 먼 얘기만은 아니다. 스웨덴은 은행 지점들이 더는 현금과 현금 자동지급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스웨덴은 고액권 지폐인 1000크로나(약 13만990원) 권종을 단계적으로 없애 2013년 완전 폐지했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용카드로 거래도 하고 교회 등에 헌금도 할 수 있다. 2030년이면 효율적으로 화폐 없는 국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현금을 없애면 개인의 경제활동 자유가 침해된다는 주장도 있다.
"종이 화폐 사용을 줄이는 정책은 반드시 일반인들이 현금을 통해 적당한 규모, 익명성이 보장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들은 대규모 거래에서 반복적으로 현금을 사용하는 일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이 정책은 약 20~30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혁은 저소득층, 특히 은행을 잘 활용하지 않는 가구에 끼칠 영향을 철저히 계산해서 이뤄져야 한다."
―저소득층은 스마트폰,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어렵다.
"저소득층에 현금카드와 기본적 스마트폰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 지원책을 포함해야 한다. 이미 스웨덴과 덴마크 같은 몇몇 국가가 이런 방식을 시행하고 있고, 다른 여러 국가도 비슷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첫째 단계는 우선 모든 정부에서 지급 결제가 가능한 현금 계좌 개설을 지원하는 것이다. 종이 화폐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든 안 하든 정부의 재정 지원은 매우 좋은 공공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 배정원 기자 입력 : 201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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