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위기 때마다 더 성장했다"
선제적 투자로 90년간 화학섬유 1위… 日 도레이 CEO 닛카쿠 아키히로
녹슬지 않는 비행기(보잉), 가벼운 골프채(혼마), 발열내의(유니클로)… 素材로 세상을 바꿨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있던 2001년. 미국발(發) 정보통신기술(IT) 버블 붕괴로 도레이 일본 본사가 사상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화학섬유산업은 경기를 잘 타기로 유명하다. 기초 기술이 어렵지 않아 신흥국들이 경제 부흥을 위해 많이 선택한다. 한국도 1960년대부터 화섬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고, 1990년부터는 '탈(脫)섬유화'를 진행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사양산업이었다. 하지만 도레이는 경쟁 기업들과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국내 생산을 해외로 돌리지도 않았다. 연구·기술(R&D) 개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실적이 낮은 분야를 분사하지도 않았다. 대신 경쟁사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원천 기술 수준을 높이기 위해 R&D 투자를 늘렸다.
주식시장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애널리스트들은 "도레이가 섬유에 매달리고 있다"며 비판했다. 주가는 날마다 폭락했다.
하지만 도레이 경영진의 판단은 달랐다. 당장은 섬유산업이 천대받을지 모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계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이후 고(高)기능성 섬유 매출이 증가하면서, 6년간 영업이익이 5배 가까이 상승하며 부활했다.
세계경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1·2차 오일쇼크와 플라자 합의, 1·2차 버블 붕괴, 최근엔 리먼 브러더스 사태까지. 하지만 도레이는 위기마다 조금씩 진화하며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올해 창립 90주년을 맞이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지난달 군산 공장 준공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닛카쿠 아키히로(日覺昭廣·67) 도레이그룹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90년 동안 화학섬유 한길만 걸어왔습니다.
"만약 도레이가 위기 순간마다 시류(時流)에 영합한 판단을 했더라면 지금의 도레이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서 핵심 기술과 동떨어진 사업에 손대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하지도 않았지요. 현재 유행하는 경영 스타일을 흉내 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사업 내용을 시대에 맞게 고도화하며 위기를 탈출했습니다. 시대에 맞는 고기능 제품을 개발하고, 원사·원면부터 최종 제품까지 모든 제품을 전 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그래서 저희는 '1-3-10' 경영 원칙을 세웠습니다. 1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 전망을 갖고, 3년 단위로 중기 과제를 설정해, 매년 수익 목표를 위해 속도감을 갖고 경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갖고 있으면 크게 길을 벗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차질이 발생해도 신속히 대응 방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방안을 마련할 때는 기업 철학에 맞게 움직입니다. '기업은 사회의 공기(公器·공공의 것)'라는 것이지요. 주주와 고객, 종업원,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의 성과인 부(富)를 분배받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앞을 내다보는 안목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그건 옛날 경영자분들께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요(웃음).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기본을 충실하게 다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의 요구라는 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당장 잘되는 쪽으로 눈이 돌아갑니다. 하지만 기본에 충실하면 어떤 위기에도 버틸 수 있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이 현장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현장주의'는 고(故) 마에다 가쓰노스케(前田勝之助) 명예회장이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분석하다 보면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집니다. 머릿속으로만 판단하다 보면 본인이 잘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면 기본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무제표에 나오는 숫자만 보고 사업을 통폐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정통한 임원이 자신의 경험과 현장의 상황을 비교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이는 사회 현황을 보는 것도 포함됩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혁신은 무엇입니까.
"혁신이란 '새로운 가치의 창조'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새로운 데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영역에서 승부를 겨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하이쿠(일본 전통의 짧은 시) 작가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의 말 중 '깊이는 새로움이다'가 있습니다. 하나의 일을 깊게 파고들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도레이의 R&D 원칙인 '극한추구'와도 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DNA입니다."
- ▲ 일본 아이치현 가와사키중공업에서 제작 중인 보잉 787기의 기체 부품. 보잉에 부품을 납품하는 가와사키중공업과 미쓰비시중공업은 도레이의 탄소섬유를 사용해 기체 부품을 만든다. 탄소섬유는 철보다 강하지만 가벼워 레이싱용 자전거, 스페이스X의 우주선 등에 사용된다. / 블룸버그
1926년 미쓰이(三井) 물산의 면화부서가 독립해 탄생했다. 당시 섬유라고 하면 면이나 마, 모 등의 천연섬유밖에 없을 때다. 도레이는 인류 최초의 화학섬유인 레이온을 만드는 최첨단 기업이었다. 레이온에 이어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등의 신소재를 잇따라 개발하며 일본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아직 이름은 낯설다. 기업이 소비자인 B2B 기업인 데다, 제품의 기본 재료인 소재(素材)를 만드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소재는 사회를 본질적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발열 내의’로 불리는 유니클로의 히트텍은 겨울철 옷을 두껍게 입던 문화를 바꿨다. 이세이 미야케의 옷은 여성이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누릴 수 있게 했다. 혼마의 골프채는 가벼운 채로 공의 비거리를 늘렸다. 보잉의 최신 비행기는 녹슬지 않아 습도를 지상과 맞출 수 있어 쾌적한 비행이 가능하게 했다.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 도레이의 소재다.
―유니클로 히트텍을 제작할 때 1만번 이상 시제작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의류용 신소재를 개발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원사, 원면부터 염색, 봉제까지 전 분야에서 축적된 기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저희는 지금도 더 좋은 히트텍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개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개발하다 실패한 사례는 없나요.
“실패는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지요. ‘도레이시(Toraysee)’라는 초극세 섬유가 있습니다. 원래 의류용으로 개발된 것인데, 때가 너무 잘 타서 실용적이지 않다는 판단에 폐기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더러워진다면 차라리 때를 닦는 데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경닦이용으로 제작·판매했는데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이지요. 원래 안경닦이는 안경을 사면 딸려오는 존재였지만, 도레이시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은 1장에 500~700엔을 주고 안경닦이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패한 제품이 새로운 소비 행동을 창출한 것이지요.”
―항공기 소재로 개발된 탄소섬유도 보잉에 납품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그 과정에서 손해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소재를 개발할 때 ‘주요 수입원이 될 것이냐’보다 ‘세상에 필요한 소재인가’를 먼저 고려합니다. 탄소섬유의 기본 기술이 개발된 것은 1961년 신도 아키오 박사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저희 경영진들은 앞으로 항공기 산업이 성장할 것이고, 그럴 경우 에너지 자원의 미래 측면에서 항공기의 경량화가 세계적인 추세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 신도 박사와 함께 탄소섬유의 상용화를 1971년부터 시작했습니다. 2011년부터 보잉에 본격적으로 납품했으니 개발부터 50년이 걸린 셈이지요. 항공기 소재를 납품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안전성 등의 여러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소재를 바꿀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탄소섬유를 낚싯대, 골프클럽, 테니스 라켓 같은 스포츠 용품부터 납품했습니다. 스포츠 같은 취미 세계는 뛰어난 소재가 나타나면 비싼 돈을 쓰더라도 손에 넣으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신소재가 받아들여지기 비교적 쉬운 시장입니다. 저희는 스포츠 용품부터 납품하며 R&D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돈을 벌었습니다. 이는 기술의 진화로도 이어졌습니다. 낚싯대를 만들 때 사용된, 가느다란 제품을 정밀하게 만드는 기술은 항공기를 만들 때도 활용됐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신소재를 개발할 때는 진입하기 쉬운 용도부터 들어가 수익을 올리면서 동시에 기술을 갈고 닦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본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끈질기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제품이 만들어질 때까지 개인 재산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진행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기업이 많습니다. 이런 점이 일본에 뛰어난 소재 기업이 많은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재 산업은 개발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구미형의 단기 지향적인 경영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도 속도가 중요한 조립 산업이 강하고 구미형 경영을 선호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경영이 필요한 소재 산업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재 산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남들이 쉽게 추격할 수 없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화학 기업들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지만, 그들이 따라잡은 건 도레이는 더 이상 하지 않는 범용 제품입니다. 도레이는 탄소섬유는 50년 이상, 수처리막은 40년 이상의 축적된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문은 간단히 따라잡지 못할 것입니다.”
―직접 도레이의 소재로 물건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파는 B2C 사업에 대한 계획은 없으신가요.
“도레이는 핵심 기술과 사업 기반이 없는 분야에 진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소매에 대한 노하우가 없으므로, 그런 계획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향후 10년, 혹은 30년 내 어떤 소재가 주목받을까요.
“저희가 앞으로 예상하는 분야는 지구 환경오염 문제개선,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한 생활의 질 향상과 의료 현장의 부담 경감입니다. 신흥국에서는 인구 증가 문제가 부각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수처리막이나 인공신장 재료들이 성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섬유산업 중에서도 기저귀용 부직포나 생체센서용 전극이 되는 소재가 유망합니다. 탄소섬유도 항공기·자동차뿐 아니라 우주·로봇용, 의료기기, 토목·건축용 등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경기 부양 정책)와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등으로 일본 경제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 산업계는 샤프와 도시바 일부 사업 부문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고, 미쓰비시 자동차 등이 도덕적 해이 문제에 시달리는 등 위기입니다. 일각에서는 일본 기업의 폐쇄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브렉시트 같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길 때마다 금융 자산을 움직이는 투기 세력은 절호의 찬스라고 여기며 머니 게임을 시작합니다. 각국 정부는 이런 머니 게임을 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베 정권에 대해서는 엔화 정책에만 많은 관심이 쏠리지만, 사실 기업이 원하는 문제들은 더 있습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확실한 발효와 또 다른 대규모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경제 협력 추진, 고용 분야 등에서 지나친 규제의 개혁, 법인실효세율의 아시아 인접 국가 수준까지의 인하, 안정적이고 저렴한 에너지의 확보, 엄격한 환경 규제 완화, 환율 안정화 등입니다. 기업에서는 이를 육중고(六重苦)라고 부릅니다.
다른 일본 기업에 대해 저희가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근 일본 기업 문화에 억지로 구미식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물은 바뀌지 않은 채 외형만 바꾼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 이럴수록 현장으로 되돌아가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기업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기업 문화는 사람을 기본으로 하는 경영입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영미권의 금융자본주의 경영보다 훨씬 경쟁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레이는 이런 상황을 신경 쓰지 않고 연구 개발을 철저히 해 전 세계 흔들림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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