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다닐 때만 해도 이렇게 훌쩍 떠나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퇴직을 하니 언제 어디서나 떠날 자유를 얻은 셈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직장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직장 일도 치열했지만 워킹맘에게는 또 하나의 전쟁이 있다. 시간 전쟁이다. 워킹맘의 아침 10분은 1분보다 더 빠르게 지나간다. 출근 준비하랴, 학교 가는 두 딸 준비물 챙겨주고 밥 차려주랴 정신이 없었다. 아침도 거르고 헐레벌떡 출근하기에 바빴다. 아이들 양육을 위해 시댁 근처에 살다 보니 직장이 집에서 멀어져 힘들었다. 한 시간 걸리는 출근 시간도 아까웠다. 그 시간에 아이들 더 봐주면 좋은데…. 이렇게 30년 동안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투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2년 전 어느 날 퇴직을 했다. 자유가 생겼으니 그동안 함께하지 못한 만큼 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던 차에 올해 두 딸과 거푸 여행을 했다. 처음 모녀 여행을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부터 한다. "남편은 어떡하고 가나?" '아니 나이 육십이 된 남편을 어떻게 하다니?' 나의 대답은 "혼자서도 잘해요." 사실 남편은 손재주 없는 나보다 요리, 다림질 다 잘한다. 어찌 됐든 아직 직장이 있는 남편은 직장을 다녀야 한다. 내 여행을 더 정당화할 겸 한마디 덧붙였다. "그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니까요."
여행 경험 많은 친구들은 큰딸과의 모녀 여행을 걱정해줬다. 첫마디가 "여행 가서 조심해라. 더 싸우기 쉬워." 실제로 떠나보니 '어디로 갈까? 어떤 호텔을 예약할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결정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큰아이와 의견이 엇갈렸다. 친구들 말이 맞았다. 의견이 안 맞고 피곤할 때는 여지없이 토닥거렸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안해" 한마디만 하면 모녀는 금방 무장 해제됐다. "나도 미안해."
파리에서 돌아와 이번에는 아직 학생인 작은딸과 지난 5월 여행을 떠났다. 딸이 조수 노릇 하고 나는 운전하면서 미국의 옐로스톤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아이다호 보이시 공항에서 차를 렌트했다. 보이시 공항에서 옐로스톤까지는 5시간 반이나 걸린다. 나중에 차를 반납할 때 보니 2박3일 운전한 거리가 2마일이 부족한 1000마일이었다. 서울 부산을 두 번 왕복하고도 넘는 거리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운전을 잘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20년간 묵힌 장롱 면허로 멀고도 험난한 산길을 운전했으니 오죽했을까? 30년을 기다린 모녀 여행은 못 하는 운전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여행을 한들 지난 30년간 함께 보내지 못한 지나간 세월을 어찌 보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혼 적령기에 이른 두 딸은 어느덧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 직장 다니면서 우리 키우느라 고생 많았어요." 학교 모임에 단 한 번도 못 갔던 엄마를 원망했던 딸이 철들어 하는 말이라 더욱 애틋하다. 지난 30년을 돌이켜보니 일에만 몰두하면서 살아왔다. 지금은 나 자신을 돌아보고 가정의 소중함도 새롭게 깨달았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생활에서 이젠 가족과 함께하며 옆도 보고 뒤도 살피는 여유를 갖고 싶다.
미국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뒤 작가의 길을 선택하고 베스트셀러 '행복 프로젝트(Happiness Project)'를 쓴 그레첸 루빈은 말한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 집은 행복한 기억의 보물섬이다."
요즈음 그녀의 말에 더욱 공감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오늘의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소
중하고 오늘 내가 하는 일들이 다 기쁘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일도, 또 하나의 가족인 나의 고양이들 '하니와 둘리'와 놀아주는 일도 다 보람 있고 즐겁다. 또 다른 모녀 여행을 꿈꾸는 일은 더 기쁘고 기다려진다. 올가을에는 또 어디로 갈까? 큰딸은 벌써 성화다. "엄마, 놀면서 뭐해요? 빨리 여기 와요. 같이 여행 가요."
조선일보 이복실 前 여성가족부 차관 입력 : 2016.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