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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저력, 일본의 저력

해암도 2016. 7. 7. 07:06

브렉시트 후폭풍으로 일본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기에 쓰쿠이씨에게 안부 이메일을 보냈다. 도쿄에서 살 때 쓰레기 분리수거 규칙부터 일본식 한자 쓰는 법까지 '일본 생활 엑기스'를 내게 전수해준 이웃집 할아버지다. 내년이면 만 70세가 되는 그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정년 퇴임하고서 연금으로 노후를 보낸다. 이번 일로 타격을 받는 것 아니냐며 시시콜콜한 걱정 한 보따리를 담아 편지를 보냈는데 담담한 답장이 날아왔다.

'이런 때일수록 일본의 저력(底力)이 드러나겠지요.'

편지의 마지막 문구가 눈에 박혔다. 문맥상 저력의 뜻이 와 닿지 않기도 했다. 내가 아는 '저력'은 '벼락치기'와 비슷한 느낌이다. 평소 없던 힘이 비상시에 발휘돼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의미의 단어다. 한 번도 용상 180kg을 성공한 적 없는 역도 선수가 올림픽 무대에서 갑자기 200kg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일본어 사전을 찾아봤다.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사시에 나타나는 강한 힘'이라 풀이한다. 일영사전도 찾아보니 'underlying strength(기저의 힘)'라 돼 있었다. 아, 이런 뉘앙스구나! 무릎을 쳤다. 저력이 쓰이는 상황이 비상시인 것은 두 나라가 같다. 그런데 우리의 저력이 '악으로 깡으로' 짜내는 초능력에 가깝다면 일본의 저력이란 평소에 갈고 닦은 기초 체력 개념이었다. 우리는 저력을 '발휘하고', 일본은 저력을 '드러낸다'.

직장 생활 4~5년차에 접어든 친구들이 요즘 회사 다니기 무섭다고 아우성이다. 경제 뉴스 한쪽에 자리하는 정리 해고와 연봉 동결 뉴스가 출퇴근길을 살얼음판으로 만든다. 회사마다 비관적인 하반기 경제 전망을 근거로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조하는데, 이미 탈진 상태인 친구들은 더는 짜낼 힘이 없다고 메신저 대화방에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새삼 쓰쿠이씨의 덤덤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졌다. 전후(戰後) 세대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일 수도, '잃어버린 20년'을 버텨낸 관록의 힘일 수도 있다. 이번 브렉시트가 아베노믹스에 역풍이 될 것이란 전망에도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관방부(副) 장관은 "일본 경제의 하반신은 튼튼하다"고 저력을 과시했다.

[2030 프리즘] 한국의 저력, 일본의 저력
일상의 성실함은 한·일 직장인이 다를 바 없는데 ,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서바이벌 오디션 치르듯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낸다. 이러다 진짜 위기가 닥치면 초능력 같은 저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젖먹던 힘 짜내는 이런 '악바리 근성'도 없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다. 위기가 오면 '평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이겨낸다'는 자신감이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한 것 아닐까. 물론, 그 자신감은 거저 생기지 않는다.

조선일보   양지혜 디지털뉴스본부 기자양지혜 디지털뉴스본부 기자   입력 : 2016.07.07